국회 광주특위는 18일 오전 국회에서 김대중 평민당총재와 이희성 전 계엄사령관을 증인으로 출석시킨 가운데 청문회를 열고 광주사태의 발발동기, 5·17비상계엄확대조치의 정당성 여부, 광주사태 진압과정상의 살상경위와 발포명령 최고 책임자 문제, 김대중씨와 광주사태의 연계성, 신 군부의 사실상 쿠데타 여부 등에 관해 집중적인 신문을 벌였다.
특위가 증인으로 채택, 출석을 요구한 최규하·전두환 두 전 대통령은 이날 청문회에 출석하지 않아 야 3당은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동행명령 장 발부 등 법적 절차를 밟을 계획이다.
텔리비전으로 전국에 생 중계되는 가운데 이날 오전 10시 개회된 청문회는 첫 증인으로 나선 김대중씨를 상대로 민정당의 심명보 의원이 첫 신문을 시작했다.
심명보 의원(민정)은 『국민투쟁 행동강령에 △국군은 비상계엄에 불복하라 △전 국민은 집회와 시위를 통한 민주화투쟁을 전개하라고 되어 있고, 전경이 시위대의 차량에 깔려죽는 상황에서 증인이 주장하는 「합법적인 민주화 촉진운동」이 될 수 있다고 보았는가』고 묻고 『이 같은 상황이 5·17 비상계엄확대와 5·17사태를 가져 왔다고 생각지 않는가』고 따졌다.
심 의원은 『학생시위가 극렬한 와중에 5월20일 정오 전국적인 「민주화 촉진국민대회」를 개최한다고 선언한 바 있는데 이것이 5·17 비상계엄확대를 초래한 것이 아닌가』고 물었다.
심 의원은 『김 총재가 지난해 12월 대통령선거 때 광주사태 사망자가 1천명이 넘는다고 했는데 그 증거가 무엇인가』고 물었다.
김대중 총재는 『국민투쟁행동강령은 당초 그런 내용이었으나 채택되지는 않았으며 나의 주장으로 군대에 대한 불복종요구를 삭제하고 계엄령해제 등 당시의 일반적 주장으로 바꿨다』면서 『5월 14일의 동아일보에 실을 예정이던 시위자제 요청기사를 계엄당국이 못 싣게 했고 16일부터는 나와 김영삼씨의 시위자제요구에 따라 학생들이 시위를 자제했는데도 5·17사태가 일어난 것은 일부군인들의 명분 없는 집권야욕 때문이었다』고 답변했다.
김 총재는 80년 5월12일 북악 파크 호텔에서 문익환·장기표씨 등 재야인사들과 만나 시국문제를 논의한 일이 있는가 라는 질문에 『기억한다』고 시인했으나 이 자리에서 민주인사들이 참여하는 민주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민주화운동의 목적이며 서울대 등 대학동정을 살펴보라는 지시를 내렸느냐는 질문에는 『없다』고 부인했다.
그러나 김 총재는 5월8일 장기표씨가 학생시위계획을 보고했고 좌중 인사들이 김대중씨 주도하의 과도체제를 구성하자는 제의를 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그날 회의는 민주화를 위한 국민운동을 전개하면서 그 조직을 만들자는 것이었다』고 답변했다.
김 총재는 광주사망자수를 1천명정도라고 주장한 것은 미국에 있을 때 「글라이스틴」당시 미 대사가 「광주사망자는 1천명을 넘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어 대사가 그런 말을 할 때는 상당한 근거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그렇게 주장한 것이라고 말했다.
김 총재는 김문원 의원(공화)의 『발포명령자의 이름이 떠오르고 있다고 했는데 이를 밝힐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상황증거와 과거 기관에 근무하던 사람들로부터 직접 들은 바에 따르면 전두환씨가 발포명령자라는 것은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김 총재는 『광주사태의 피해자로서 가해자 처리를 어떻게 하기를 원하느냐』는 김광일 의원(민주)의 질문에 『죄는 미워하나 사람에게는 연민을 느낀다는 심정으로 나와 우리 당은 정치보복은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김 총재는 전두환씨에 대한 사법처리문제에 대해 『정권을 내놓고 난 뒤 법을 위배했다 해서 처벌하는 관례가 되풀이되면 정권의 순조로운 교체나 정권안정이 어렵다』며 정치보복을 반대했으나 『부정축재에 대한 사법적 조사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며 부정의 진상에 대해서는 특위뿐만 아니라 수사당국에서도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