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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금 빼?" 온라인 덮친 美 '세컨더리 제재' 공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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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 밤 회원 수가 50만명에 육박하는 한 재테크 온라인 카페에 이런 글이 올라왔다. “북한 석탄 관련 은행에서 사람들이 돈 빼고 있네요. 정부는 못 믿겠다고요.” 이 글엔 “안 뺀 사람 있어요? 1주일 전에 3억 예금 해지했는데” “빼야 하나요? 정말 몰라서 묻습니다” 등의 댓글이 달렸다. 일부 시중 은행의 이름도 등장하며 갑론을박도 오갔다. 북한산 석탄의 위장 반입 논란으로 미국에 제재에 나설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면서 일부 네티즌까지 불안하게 하고 있는 셈이다. 다른 재테크 관련 온라인 카페에도 “북한 석탄 관련해서 미국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다”는 요지의 글이 올랐다. 이 불안감은 세컨더리 제재(secondary boycott)의 위력에서 나온다.

북한산 석탄을 반입했던 의혹을 받는 진룽호가 지난 7일 경북 포항신항에서 석탄 하역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날 외교부는 진룽호에 대해 위반 혐의가 확인된 바 없다고 밝혔다. [뉴스1]

북한산 석탄을 반입했던 의혹을 받는 진룽호가 지난 7일 경북 포항신항에서 석탄 하역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날 외교부는 진룽호에 대해 위반 혐의가 확인된 바 없다고 밝혔다. [뉴스1]

세컨더리 제재는 미국 정부가 자국이 제재한 국가와 거래를 한 제3국 정부 및 기업ㆍ은행 등에 대해서도 제재를 가하는 조치다. 미국이 금지한 탈법 행위를 한 기업만을 제재하는 게 아니라 해당 기업과 거래를 했던 제3의 기관ㆍ업체까지도 제재할 수 있어 막강한 압박 수단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관련 업계에선 존 볼턴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7일(현지시간)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북한산 석탄 문제를 놓고 통화했다고 공개하면서 바짝 긴장하는 분위기다. 볼턴 보좌관은 폭스 비즈니스와의 인터뷰에서 “정의용 실장이 석탄 밀반입과 관련한 한국 정부의 수사 상황을 설명했다”며 “검찰 기소를 포함해 한국 법에 따라 적절하게 처리할 것이라 말했다”고 공개했다.
현재 북한산 석탄 문제로 수면 위로 떠오른 곳은 한국전력 자회사인 남동발전과 석탄 수입을 입찰 방식으로 대행한 H사다. 물론 해당 업체들과 당사자들은 밀반입 의혹을 전면 부인하고 있다. 한전은 지난 2일 로펌 2곳에 이번 사항이 대북 제재 위반 대상이 되는지 등을 알아보기 위해 법률 자문을 의뢰했다.
업계가 민감하게 대응하는 이유는 혹시나 세컨더리 제재으로 미국 정부의 제재 대상이 되면 미국 시장 진출이나 미국 업체와의 거래가 중단되는 데다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 금융시장에서 퇴출당해 사업이나 경영에 큰 타격을 입을 수 있어서다. 2005년 마카오의 방코델타아시아(BDA)가 대표적이다. 당시 미국 정부는 BDA에 북한 통치자금이 예치돼 있다는 이유로 미국 은행과의 거래를 중단시켰고 결국 BDA는 뱅크런(대규모 예금 인출 사태)을 겪으며 사실상 파산했다.
이번엔 8일(현지시간) 미국 하원 외교위원회 테러ㆍ비확산ㆍ무역 소위원장인 테드 포 공화당 의원이 미국의소리(VOA)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석탄 밀반입에 연루된 한국 기업에 대해 세컨더리 제재를 부과할지에 대해 “그래야 한다”고 답해 업계의 우려를 더 키웠다.

지난 2017년 9월 북한 선박 '을지봉' 호가 러시아 홀름스크 항에서 북한산 석탄을 하역하는 장면.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위원회 산하 전문가패널이 지난 3월 공개한 연례보고서에 실린 사진이다. [연합뉴스]

지난 2017년 9월 북한 선박 '을지봉' 호가 러시아 홀름스크 항에서 북한산 석탄을 하역하는 장면.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위원회 산하 전문가패널이 지난 3월 공개한 연례보고서에 실린 사진이다. [연합뉴스]

대미 전문가들은 그러나 한ㆍ미동맹 관계를 감안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 정부가 한국 업체를 세컨더리 제재 대상으로 지정할 경우 양국 관계에 엄청난 후폭풍이 오기 때문이다. 사실상 대북 공조에 대한 한ㆍ미의 파기 선언이나 다름없어서다. 최강 아산정책연구원 부원장은 “동맹인 한ㆍ미 관계 관리 차원에서 미국 정부가 직접 나서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며 “지난해부터 밀반입이 계속돼 왔다는 점에 대해 불쾌감은 표시하고 경고성 메시지는 보내되 한국 정부가 자발적으로 조치하도록 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세컨더리 제재에 대한 우려가 자칫하면 악성 유언비어로 변질될 수도 있어 문제다. 조성렬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사태의 명확성이 아직 담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여론이) 지나치게 나가는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한ㆍ미 관계에 정통한 한 전직 외교 관료는 한국 기업이 고의적으로 북한산 석탄을 수입했는지 등에 대한 법률적 해석이 복잡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 전직 관료는 익명을 전제로 “이번 밀반입 사태로 미국이 특정 기업을 콕 찍어서 세컨더리 제재를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선 논리적ㆍ법적 분석이 더 필요하다”며 냉철한 접근을 요구했다.
 여론이 소모적 루머에 더는 휩쓸리지 않도록 정부가 신속하고 선도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도 많다. 외교부와 관세청은 지난 8일 저녁 보도 해명자료를 냈다. 석탄 밀반입 선박과 관련해 억류 조치를 하지 않은 것은 해당 조치를 할 만한 특이점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게 요지였다. 그러나 천영우 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은 “정부가 신속히 움직여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며 “미국과 국제사회에 한국에서 대북 제재망이 뚫리는 일은 앞으로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고 조언했다.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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