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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는 ‘코피 전략’ 카드 버리지 말아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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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마이클 그린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선임부소장

마이클 그린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선임부소장

한반도에 불어닥친 평화 무드에 취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지지자들은 벌써 잊었을지도 모른다. 군사력을 동원해 북한의 핵·미사일 프로그램을 중단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던 이가 바로 트럼프 대통령이라는 사실 말이다. 그만 그랬던 게 아니다. 존 볼턴 백악관 안보보좌관과 허버트 맥매스터 전임 안보보좌관 모두 제한적 군사 조치를 옹호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도 중앙정보국(CIA) 국장 시절부터 대북 강경론자였다. 트럼프 행정부가 북한의 도발을 무력으로 중단시키는 조치를 진지하게 고민한 것은 분명하다.

군사 옵션 폐기 선언하지 않았고 #비핵화 진행의 증거도 전혀 없어 #한국 정부는 회귀 반대하겠지만 #채찍 효과도 진지하게 고민해야

더구나 이 군사 옵션은 나름의 근거도 가지고 있었다. 지난해 11월 북한은 화성 15호를 시험 발사하여 핵탄두를 장착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로 미국 본토를 위협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이 미사일은 이동식 발사대와 고체 연료를 사용하기 때문에 추적이 어렵다. 발사 전에 무력화시키기 힘들다는 의미다. 지난해 여름 군사적 옵션 옹호론자들은 김정은 체제는 매우 잔인하고 공격적이며 우상화 된 집단이라 합리적 예측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김정은 위원장을 위험한 도박사에 비유했다. 당시 CIA는 향후 북한이 ‘재진입’ 실험에 성공한다면 ICBM 기술이 완성되는 것이라고 했다. 핵탄두가 대기권으로 재진입할 때 발생하는 고열을 견뎌내고 지상의 표적에 명중하는 기술을 갖췄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6월 북미 정상회담 뒤에 북한의 핵 위협을 완전히 해결했다고 말했을 때 그 말을 그대로 믿은 건 열렬한 공화당 추종자들뿐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은 2년 전 여론조사에서는 북한에 대한 강경노선을 주장한 유권자들이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 유해가 송환되는 등 북한에서 긍정적인 조치가 나오고 있지만, 아직 핵·미사일 위협의 실질적인 완화나 비핵화 절차 진행의 증거는 없다. 이러한 현실은 트럼프 대통령의 계산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그는 싱가포르 정상회담에 취재진을 보낸 언론사 숫자를 자랑하느라 바쁘다. 반면에 미 국가안보팀은 의회 청문회에 출석해 더디게 진행되는 비핵화 협상 과정을 설명하고,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인내심을 갖고 지켜봐 달라고 부탁해야 하는 입장이다.

글로벌 포커스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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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대통령 입장에선 11월 중간 선거를 치르기 전에 자신이 김정은 위원장에게 속았다고 고백하면 정치적으로 득 될 게 없다. 북한이 그때까지 핵·미사일 시험으로 트럼프 대통령을 공개적으로 배신하지 않는 한, 트럼프 정부에 충성하는 언론사와 의회 지지자는 정상회담을 부정하는 어떤 말도 공개적으로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국가안보팀 역할의 한계를 인식하고 있는 이들은 외교 협상 덕분에 북한의 재진입체 실험은 진행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위안거리로 삼는다.

그러나 그 작은 위안을 위해 치른 대가는 너무 비싸다. 김정은 체제를 정당화하고, 한·미 연합훈련 취소로 동맹의 방어체제를 와해시키려는 북·중·러의 장기 목표에 일조했으며, 북한의 인권 탄압에 눈을 감았다. ‘쌍중단(雙中斷: 북한 핵·미사일 도발과 한·미 연합훈련 동시 중단)’의 한계도 명확하다. 싱가포르 회담 이후에 김정은 위원장이 핵 개발을 중단시켰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쌍중단을 통한 ‘동결’은 몇 달 안에 사라질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싱가포르 회담에서 군사적 옵션을 폐기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실질적인 협상을 맡은 국가안보팀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최근 몇 달 새 동북아에서만 군사력을 늘렸다. 북한이 지닌 본질적인 위협은 협상 테이블에 군사적 옵션을 올려놓기 어렵게 만든다. ‘예방 타격’(북한의 핵 능력 증강을 막기 위한 군사 공격)은 지난 여름에 비해 국제 사회와 미국 의회의 동의를 구하기 더 어렵게 됐다. 특히 싱가포르 회담 이후에 트럼프 대통령이 자랑하며 전한 승전보는 향후 군사 행동에 대한 의회의 신뢰와 지지를 구하는 데 부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어쩌면 전례 없는 북·미 정상회담은 북한과의 외교적 협상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트럼프 행정부가 증명하는 장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한국의 문재인 정부 입장에서는 남북협상 결과를 과도하게 평가해서라도 군사 옵션으로의 복귀를 막고 싶을 것이다. 그러한 생각은 상황에 대한 오판이다. 북한이 핵무기 포기의 길로 접어들지 않았음이 명백하다면 협상에서 채찍이 가져올 효과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협상이 당근에서 채찍으로 전환될 경우 미국이 고려하는 채찍이 올바른 채찍이 아니라고 주장하기 시작할 것 같다.

마이클 그린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선임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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