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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리비아 납치 근로자 구출에 온 힘 쏟으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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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지난달 리비아에서 한국인 근로자가 현지 무장단체에 납치돼 29일째 억류 중인 사실이 뒤늦게 보도됐다. 국내 언론은 이를 진작 알았지만 당국의 요청에 따라 보도를 자제해 왔다고 한다. 납치 사실이 크게 다뤄지면 범인들이 몸값을 확 올릴 수 있는 탓이다. 아무리 신속한 보도가 생명인 언론이라도 불가피했을 것이다.

몸값 지불 등은 신중한 판단 필요 #지나치게 감성적인 청와대 논평

우리에겐 납치와 관련된 쓰라린 기억들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2004년 이라크에서 납치됐던 김선일씨 피살 사건은 큰 상처를 남겼다. 2007년 아프가니스탄에서 일어난 샘물교회 피랍사건 때는 23명이 억류됐다 거액을 주고 21명이 풀려났지만 2명은 희생됐다. 이해부터는 아프리카 해역에서 해적에 의한 한국 선원 납치사건이 줄을 이었다. 그때마다 정부는 우왕좌왕하는 바람에 돈은 돈대로 쓰면서 무고한 생명을 잃는 일을 자초했다. 김선일씨의 경우 회사 측과 납치범들 간의 협상이 진행되는데도 정부가 이라크 파병을 발표해 그를 사지에 몰아넣은 꼴이 됐다. 샘물교회 사건 때는 2명이 희생된 뒤에야 납치범들과의 대면 협상을 시작해 결국 돈으로 사태를 해결했다. 한국 정부는 납치범들과 협상하고 몸값까지 준다는 선례를 만방에 알린 꼴이 됐다.

납치 사건을 어떻게 다룰지는 극히 미묘한 문제다. 특히 석방을 위해 몸값을 주는 게 옳은지는 선진국 간에도 입장이 갈릴 정도로 심한 논란거리다. 거액의 몸값을 주면 똑같은 인질 사건을 부추길 게 뻔한 까닭이다.

이 때문에 미국은 몸값 지급을 법으로 막고 있으며 영국·일본도 이 원칙을 따른다. 반면 영국을 뺀 유럽 국가는 거액의 몸값을 주고 인질을 빼 온다. 물론 어느 쪽이 옳다고 단정할 순 없다. 양쪽 모두 확실한 논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분명한 건 국민의 생명을 책임진 정부는 신중하면서도 인질 구출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2004년 이슬람 무장단체 IS(이슬람국가)에 의해 일본인 2명이 납치됐을 당시 아베 신조 총리는 중동 순방 일정을 단축하고 귀국한 뒤 바로 관계 장관 회의를 열었다. 그러곤 새벽까지 요르단·터키·이집트 정상에게 전화를 걸어 협조를 부탁했다.

이런 일본의 긴박한 움직임과 비교하면 이번 우리 정부의 대처는 안이하다는 느낌이다. 아덴만의 청해부대를 리비아 근해로 급파했다곤 하지만 이번 사건은 해적의 소행이 아니다. 또 사건이 처음 알려진 지난달 6일 직후부터 사건 해결을 지휘했어야 할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대통령 순방을 돕기 위해 인도에 간 게 옳았느냐는 지적도 있다.

리비아 인질 사태에 대한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의 발표 내용도 적절한지 의문이다. 김 대변인은 피랍 사실을 알리며 “사막의 침묵에도 귀를 기울이고 있다” “타들어 가는 목마름을 몇 모금의 물로 축이는 모습을 봤다”는 등 우리 국민의 생명이 걸린 긴박한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미사여구를 썼다. 지금 청와대는 감성적인 국내용 논평보다 모든 에너지를 인질 구출에 쏟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