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심업고 응징-회유. 묘수풀이|경제난 해결이 성패 최대변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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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지난83년 등장한 알포진 대통령의 아르헨티나 민간정부는 집권5년간 국민의 지지를 바탕으로「군부의 벽」을 넘는 아슬아슬한 민주화과정을 걷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지난 46년「페론」등장이후 7명의 대통령과 29년에 걸친 5차례의 민간정부를 가졌으나 1955년 이후엔 10명의 군 출신 대통령과 18년간에 걸친 4차례의 군사통치를 경험했다.
이 9차례에 걸친 민·군 정권의 교차집권은 성격상 각각 좌·우익을 대표하고 있으며 우익군부정권이 등장할 때마다 좌익세력을 탄압하는 「추악한 전쟁」이 재현됐다.
아르헨티나의 비극으로 불리는 이같은 추악한 전쟁은 납치·고문·학살과 실종자를 포함, 1만여명의 희생자를 냈다.
「알폰신」민간정부의 민주화는 이같은 대규모 인권탄압 후유증을 치유하는 것이 첫 과제였다.
「알폰신」이 이를 위해 집권과 동시에 가장 먼저 실시한 것은 전임 군부출신대통령인 「비델라닉비올라」「갈티에리」등 3명의 장성 및 관련군부인물들의 재판이었다.「알폰신」은 민주화 과정에서 가장 위협이 되고 있는 군부 영향력을 제거하기 위해 1차적으로 47명의 군장성을 퇴역시키고「비델라비올라」「갈티에리」등 전 군정 대통령 3명을 비롯, 「라몬·캐프스」수도경찰국장(퇴역장성)등 9명의 군 지도자들에 대한 재판을 시작했다.
정하의 새 법원은 2년에 걸친 심리 끝에 85년12월 「비델라」와 「마세라」전 해군 사령관에 종신형을, 「비올라」전 대통령에 징역17년형, 「남브루시니」전 해군사령관에 8년, 「아고스티」공군사령관에 4년6개월을 각각 선고하고 이들의 군 계급과 특권을 박탈했다.
아르헨티나 민간법원은 또 86년5월 「갈티에리」전 군정 대통령에게 징역 l2년, 「아나냐」전해군사령관에게 징역 14년, 「라미·도조」전 공군 사령관에게 징역 8년을, 그리고 같은 해 12월 「캑프슨」수도경찰국장 징역 26년, 「후에체콜라즈」 전 경찰지휘관 23년, 「리체리」장군 14년, 경찰의사 「베르게스」 6년, 전 경찰간부 「코라니」에게 4년을 각각 선고했다.
아르헨티나의 민정법원은 85년까지 9백건을 기소, 연년말 까지 모두 3백70여명을 재판에 회부,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전례 없는 군부비리척결의 결단을 보였다.
특히 「비델라」등 5명의 주요 군 지도인물들에 적용된 혐의는 삭인 2백64건, 납치 1천8백79건, 고문 3백82건이었다.
특히 아르헨티나 군부는 20개 주요기업에 국민총생산 2·5%에 달하는 주식 20억 달러 어치를 보유함으로써 경제비리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알포진」은 이같은 대규모 군정비리척결 과정에서 인권단체와 군부로부터 양면 공격을 받아 정권유지에 회의론이 대두될 만큼 위기를 맞았었다.
「알폰신」이 맞은 가장 난처했던 압력은 인권단체들의 더 많은 군 인사들. 즉 군정관련 하위직급 장교 모두에 이르는 광범위한 처빈요구였다.
「알폰신」은 이에 대해 1986년 「종결법」을 마련, 의회에서 통과시켜 당시 60일 이내에 모든 기소조치를 끝내도록 했다.
이것은 끝없는 국민의 군부처벌 요구에 대한 제동장치이자 타협의 길이었다.
그러나 「알폰신」이 직면했던 더 큰 위협은 군부의 반발이었다.
재판개시 초기인 84년9월 아르헨티나 군법회의가 전 군정 지도자들에 대한 처벌을 거부함으로써 정면으로 「알폰신」민간정부에 도전했다.
「알폰신」은 전 군부지도자 재판을 민간법원으로 이관함으로써 이 위기를 넘겼다.
「알폰신」은 「비델라」등에 대한구형이 있기 직전인 지난 85년4월 아르헨티나에 군부 쿠데타를 통한 민간정부 전복의 위기감이 감돌았으나 국민들의 강력한 지지를 업고 재판을 강행, 「비델라」등에게 종신형선고의 길을 터놓았다.
재판진행 동안 군부 등에 의한 극우 테러가 잇달았고 선고공판이 있기 직전인 86년5월에는 집권여당의 6개 지구당 사무실이 거의 동시에 폭발되는 사건이 일어났다.「알폰신」은 이에 굴하지 않고 상원을 통해 방위법안을 확정함으로써 다시 군부의 정치불개입을 법으로 못박아 대처했다.
당시 군부내의 「알폰신」정부에 대한 물만은 최고조에 달해 87년초 「아로사」해군사령관이 『군 지도층에 대한 재판속행은 군 사기 저하를 초래한다』 고 경고하기까지에 이르렀다.
군부의 불만은 87년4월 코르도바 지역 주둔 제∥공수부대가 영내반란을 일으켜 3일간 정부군과 대치함으로써 표면화됐다.
「알폰신」은 단신 이 부대를 찾아가 반란주모자 「바레이로」소령과 담판, 사태를 수습했다.
아르헨티나 민주화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던 이 반란사건은 국민의 지지를 믿은 「알폰신」의 대담한 결단으로 해결됨으로써 국민의 힘이 군부의 반발을 억제한 좋은 본보기가 되고있다.
「알폰신」은 이같은 단호한 대처를 과시하면서 한편으로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군부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새로운 「복종률」을 마련, 지난87년5월 공포했다.
이 복종률은 하급장교들이 지휘관의 명령을 수행하는 군 명령 계통의 당위성을 따랐을 뿐이기 때문에 처벌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일종의 사면령이다.
이것은 「아로사」사령관이 민·군의 적정선에서의 화해를 요구한 것과 관련, 군부를 마지막 궁지로는 몰고 가지 않겠다는 「알폰신」의 정치적 결정이었다.
이 복종률은 군정 하에 가족을 잃은 피해자들로부터 강력한 반대에 부닥치고 있으나 「알폰신」은 군정비리척결 못지 않게 중요한 아르헨티나의 경제 위기 해결을 위한 정책방향전환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이의 강행을 고심하고 있다.
그러나 「알폰신」의 군부통제 및 새로운 군부 탄생을 위한 노력은 올1윌 제4보병연대의 강병1백여명이 3일간 반란을 기도했던 것처럼 항상 군부우익세력의 도전은 상존하고 있다.
「알폰신」은 매번 군부의 반발을 강경과 회유 양면으로 다스려 오고 있다. 현재 악화되고 있는 경제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경우 민·군정시대를 시계추처럼 반복한 아르헨티나의 장래에 또 다시 군정회복이라는 악령이 되살아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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