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고립」끌어낼 적극적 조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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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워싱턴=한남규 특파원】31일 발표된 미국 정부의 대북한 관계 조치는 단순한 KAL기 폭파이전으로의 환원에 그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된다. 조치 내용들이 소폭적이지만 그전보다 적극적이다.
조치의 주요항목은 여행제한완화, 인도적 품목의 수출허용, 외교관 접촉 재개 등으로 집약된다.
그러나 「찰스·레드먼」미국무성 대변인은 이날 북한사람들의 미국방문제한철폐와 관련, 학술·체육·문화 및 기타 부문의 비공식적·비정부차원의 방문을 『격려하겠다』고 말했다. 아울러 그는 미국시민의 북한방문을 『촉진하겠다』는 등 적극적인 자세를 나타냈다.
비록 대적성국교역법과 수출관리법을 적용, 일반적 통상은 금지하더라도 인도적 품목의 대북한 수출은 허용하는 방침도 아울러 밝혔다.
다시 말해 여행허용에 따른 외환관리규정과 인도적 교역에 필요한 수출입통제조항의 개정 등 후속 법적 조치가 남아있지만 미국정부는 워싱턴 평양간의 정치적 현실과 미국 내 법적 여건 하에서 취할 수 있는 최대한의 조치를 취한 것이다.
미국의 대북한정책 재고의 근거는 한국 정부의 적극적인 대북 평화 이니셔티브와 북한에 의한 방해 없는 서울올림픽개최 및 미·소·중공 등 한반도 유관 강대국의 화해 분위기 등 복합적이다.
특히 북한을 고립정책으로부터 끌어내는데 적극 참여하는 것이 한국정책에 호응하는 일인 동시에 미 국익에도 도움이 된다고 판단함으로써 현 여건 내에서 가능한 최대한의 조치를 꺼낸 것이다.
북한이 이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기 전에 미국정부가 취할 수 있는 조치는 더 이상은 기대할 수 없을 정도로 판단된다. 「레드먼」대변인은 얼마전 대북한 조치를 예고하면서 『제한적이지만 상징적으로 중요한 몇 가지 조치』라는 표현을 사용한바 있다. 북한이 긍정적 반응을 보이는 경우 미국정부는 이를 바탕으로 하는 전진적 단계를 다시 밟을 가능성이 있다.
현재로서는 공시적·정부차원의 방문을 해제대상에서 제외했지만 사태발전에 따라서는 필요한 경우 공식·정부부문의 방문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통상에 있어서도 인도적 품목의 폭을 넓혀 금수품목을 완화한다든지, 「중립적 장소」에 한정된 외교관 접촉의 경로를 확대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문제는 평양 쪽으로 넘겨진 공을 북한이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달린 셈이다. 미국의 이번 융화제스처에 대해 북한이 당장 호의적 반응을 보일 것으로 미 측은 크게 기대하지 않는 눈치다.
왜냐하면 미 조치는 워싱턴 쪽만의 독자적이고 개별적인 포석이 아니고 한국정부의 대북한 제의와 연결돼있을 뿐 아니라 서울·워싱턴의 긴밀한 협의를 통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김일성·김정일 권력승계작업의 와중에서 미국시민이 떼를 지어 북한 땅을 갈 수 있도록 사회를 개방시킬 수 있는 여건이 아니다. 물론 6·25 당시 참전한 미군병사의 유해 송환문제를 논의한다던가, 대미비방선전을 자제한다던가 하는 지엽적 반응은 북한으로부터 기대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한마디로 미국정부의 이번 조치는 당장 북한의 어떤 구체적인 대응조치를 기대해서 내놓은 게 아니라 북한이 고립에서 걸어나와 설 수 있는 마당을 마련해 준 것이다.
장기적으로는 그 여건의 조성이 필요하다는 판단이다.
북한의 반응이 없는 한 진전이 없을 것이라는 판단 위에서 미 정부는 이번 조치를 북한에 전달하는 형식에 있어 소련과 중국을 경유하는 방식을 택했다.
소련과 중국의 입장에서 볼 때 미국의 이 같은 조치를 계기로 북한의 대화 자세를 촉구하는데 보다 쉬워질 것이라고 미 정부는 계산한 것 같다.
특히 미국의 「개스턴·시거」국무성 아-태 담당차관보와 소련의 「로가초프」제1외무차관이 2, 3일 파리에서 동아시아 문제에 관한 연례협의를 벌이면서 북한이 고립정책을 전환토록 하는 문제에 관해 의미 있는 토의를 하게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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