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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세에 대학입학, 내가 나에게 "참 잘했어" 칭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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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인생환승샷(34) 늦은 배움 뒤 문학이라는 둥지에 환승 , 최윤희

인생에서 누구나 한번은 환승해야 할 때와 마주하게 됩니다. 언젠가는 직장이나 일터에서 퇴직해야 하죠. 나이와 상관없이 젊어서도 새로운 일, 새로운 세계에 도전할 수 있습니다. 한번 실패한 뒤 다시 환승역으로 돌아올 수도 있겠지요. 인생 환승을 통해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생생한 경험을 함께 나눕니다. <편집자>

시낭송가로서의 생활. [사진 최윤희]

시낭송가로서의 생활. [사진 최윤희]

나는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일부리 녹동 조그만 호수 같은 동네에서 가난한 농부의 팔 남매 중 넷째 딸로 태어났다. 집안 형편이 허락지 않아 아홉 살이 되도록 학교에 가지 못하게 해서 나는 식음을 전폐하고 매일 울기만 했다. 그런 나를 보고 아버지께서는 참다못해 입학을 승낙했지만, 농번기만 되면 가사 일을 돕기 위해 며칠씩 결석하기 일쑤였다.

그 후 학교에 다니는 날보다 결석하는 날이 더 많은 1, 2학년을 보냈다. 3학년이 되면서 아버지께서는 퇴학이라는 날벼락 같은 굴레를 나에게 씌워주었다. 할 수 없이 학교를 그만두었다. 야속하게도 부모님은 팔 남매 중 넷째인 나에게만 일을 많이 시켰다. 언니가 졸업하면서 5학년에 복학할 수 있었지만 2년이나 학교에 가지 않았으니 아는 게 없었다. 그러나 즐거웠다.

학교를 열심히 다녔다. 5학년 말 친구들이 상 받는 모습이 참 부러웠다. 공부는 따라갈 수 없고 6학년 때는 개근상이라도 받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십리 길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열심히 다녔다. 졸업식 날 졸업장, 개근상장과 부상으로 호미 한 자루를 받았다. 내 인생에 첫 번째 상이었다. 이것으로 한 많은 나의 젊은 날의 공부는 끝이었다.

가조초등학교 졸업사진. [사진 최윤희]

가조초등학교 졸업사진. [사진 최윤희]

그 후 아버지께서 운영하던 물레방아가 여름 수해로 소실됐다. 우리 식구들은 삶을 찾아 부산으로 이사했다. 연고도 없는 타향살이가 시작됐다. 아버지께서는 사업실패 충격으로 삶의 의욕을 잃었다. 매일 바둑과 장기에 의지했다. 그때부터 아버지, 어머니, 동생 넷까지 일곱 식구의 가장이 되어 16세 때부터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 햇빛을 보지 못하는 생활이 시작됐다.

새벽 4시에 쑥죽 한 그릇 먹고 도시락도 없이 10리 길을 걸어서 공장에 가서 재봉틀 일을 했다. 그때 나를 도와주는 아이가 자신은 아침을 먹지 않고 도시락 두 개를 갖고 와서 점심 때 같이 나눠 먹었다. 그리고 저녁 10시에 돌아오는 힘든 노동의 고된 삶이었다. 자연스럽게 공부라는 단어는 내 곁에서 멀어져 갔다.

공장 다니던 처녀 시절. [사진 최윤희]

공장 다니던 처녀 시절. [사진 최윤희]

어린 나이에 가장이 되고 보니, 결혼한 언니들이 정말 원망스러웠다. 부모와 동생들이 이렇게 고생하는데 쌀 한 되 도와주지 않은 것을 많이 서운해했다. 어린 마음에 ‘나는 결혼하지 않고 부모를 돕겠다’며 부산을 떠나 서울로 왔다. 다행히 취업하고 조금이지만 어머니께 약간의 송금을 하며 지내던 어느 날 동생이 먼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게 결혼은 또 다른 쓴 느낌으로 다가왔다.

작은 허전함을 느끼고 있을 때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나에게도 가족과 가정이 생겼다. 고추보다 더 매운 시집살이를 하면서 오랜 시간 동안 열심히 아이들과 남편과 더불어 살아왔다. 오로지 학교에 다니는 삼 형제의 상장과 직장에서 남편의 승진이 생활에 소소한 즐거움이었고 행복이었다. 어린 시절 그렇게 부러워했던 ‘앎’에 대한 욕심은 잊은 채 말이다.

삼 형제는 잘 자라서 첫째 아들과 막내아들은 외국인 회사에서 중역으로, 둘째 아들은 주경야독 끝에 ‘국제경영학박사’가 되어 후배 양성에 힘쓰고 있다. 당시 우리 부부도 다른 여느 노인들처럼 조신하게 우리 둘만의 느리지만 여유로운 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남편의 권유로 단기로 의무교육을 인정해 주는 중학교에 다니며 제2의 인생 환승을 시작했다.

대학 입학하던 날. [사진 최윤희]

대학 입학하던 날. [사진 최윤희]

나는 지금까지 느끼고 알아 왔던 세상과는 너무나 다른 세상을 72세가 되어서야 느낄 수 있었다. 하루하루 배움의 전당에서 10대에 느껴야 했던 천진난만한 신입생 생활의 느낌을 백발이 성성한 노구로 느끼면서도 나는 참 행복했다.

중학교 1학년 때였다. 국어 선생님이 교내 ‘시낭송 대회’에 출전할 시를 나눠 주시면서 55명 학생에게 읽게 한 다음 “최윤희 씨가 나가도록 하세요”하고 말했다. ‘혹시 잘못 들었나’하고 짝꿍에게 다시 확인도 했다. ‘문학, 나도 할 수 있어. 그래, 이거야. 지금부터 열심히 해야겠다. 문학, 너를 환승역에서 만난 동반자로 이 생명 다할 때까지 함께 갈 것이다’라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대학 수업시간 중. [사진 최윤희]

대학 수업시간 중. [사진 최윤희]

시는 나의 마음을 이렇게 쿵쾅거리며 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 소중한 문학이다. 이제 문학이라는 둥지에 환승했다. 나는 ‘문학’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그저 내 마음속의 ‘문학’은 머릿속에서 맴도는 나열하지 못하는 상상을 하얀 종이 위에 글로 표현하는 것뿐이다. 머릿속의 상상은 잘 나열될수록 읽는 이들의 상상력을 통해 감동되거나 영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문학’에 대한 꺼져가는 심지에 불을 지피고 열심히 노력할 것이다.

그 많은 날 동안 학력을 숨기고 살았다. 주변 사람들이 알 까봐 항상 두렵고 가슴이 무거웠다. 이제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명지대 문예창작과에 2014년 77세에의 나이에 당당히 입학했다. 손자뻘 되는 반 친구들과 교재를 공유하며 열심히 노력했다.

대학 졸업사진. [사진 최윤희]

대학 졸업사진. [사진 최윤희]

그 결과 2017년 9월 26일 ‘한국가곡작사가협회’에서 ‘피어보지도 못한 무궁화’라는 나의 시가 합창곡으로 탄생했다. 이 시는 나라를 빼앗기고 피지도 않은 꽃들을 데려다가 위안부라는 굴레를 씌워준 왜놈들에게 사죄의 말도 듣지 못하고 세상에서 사라져가는 할머니들을 생각하며 쓴 시다.

2017년 11월 30일 ‘한국가곡작사가협회’에서 ‘부부 사랑’이라는 시가 독창곡으로 탄생했다. 이 시는 우리 부부의 만남과 현재를 그린 작품이다. 또 ‘한국문인협회평생교육원’에서 제1회 낭송가 자격증도 수료했다.

시집출판기념회에서 가족들과. [사진 최윤희]

시집출판기념회에서 가족들과. [사진 최윤희]

‘늦게라도 참 잘했다’하고 나에게 칭찬을 해 본다. 유튜브에서 가곡 ‘피어보지도 못한 무궁화’와 ‘부부 사랑’의 멜로디가 흐르는 핸드폰을 들고 듣고 있노라면 정말 행복하다. 문학이라는 교실에서 공부하게 된 내 노년의 환승역에서 나의 100세 인생 성공을 향해 멈춤 없이 나아갈 것을 다시 한번 다짐해 본다. 이제 남은 인생을 시 낭송으로 재능 기부도 하며 아름다운 가곡 가사를 만드는 일에 매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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