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의 강압」땐 소송가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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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80년 언론통폐합과정의 진상이 타율에 의한 강압으로 드러나면서 커다란 정치적 이슈로 떠올랐고 원상회복 여부 등 앞으로의 대책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특히 정한모 문공부장관이 국회답변을 통해 언론통폐합조치를 「무리하게 추진된 불행한 일」이라고 시인하면서 『원상회복을 위해선 사법적 판단이 따라야한다』고 밝힘으로써 「사법적 판단」에 대한 관심이 높다.
재야 변호사들은 당시의 언론통폐합이 강압에 의한 것이었다 해도 외형상 주식 등 재산의 양도였기 때문에 원상회복을 위한 사법적 판단은 곧 소송을 뜻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소송에 따라선 시한이 지난 경우도 있어 어떤 소송을 낼 수 있고 소송을 통해 원상회복이 가능한지 등을 알아본다.
◇소송종류=법률상 사기나 강박에 의한 의사표시는 취소할 수 있으므로(민법 제110조) 80년 당시 강압적인 상황에서 주식을 양도했다면 이에 대한 취소청구소송을 낼 수 있다.
실제로 문공부 국정감사에서 증인으로 나온 전 경기신문사장 홍대건씨는 『80년 9월 중순 합수단 사무실로 불려가 10여일간 감금돼 혹독한 가혹행위를 당했고 9월말 신문사를 헌납한다는 각서에 서명했다』고 폭로했으며 최승효 전 광주MBC사장도 『80년 11월 12일 갑자기 광주보안부대에 불려가 위압적인 명령식으로 강요하는 분위기여서 의사에 반해 각서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고 증언했다.
이와 관련, 「입건도 되지 아니한 채 검찰청 수사관실·검사실·경찰서 보호실 등을 전전하며 24시간 이상 행동의 제약을 받은 채 수사관과 신청인인 은행측의 임직원들로부터 신청인 측의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장기간 구속될지 모른다는 위협아래서 한 채무인수의 의사표시나 수표발행행위는 특단의 사정이 없는 한 강박에 의한 의사표시라고 봄이 상당하다」는 서울고법의 판례 (80년 12월)가 있다.
피해를 본 언론사가 소송을 낼 경우 그 당사자는 주식을 인수한 회사이지만 양도과정에서 수사관등 공무원의 가혹행위가 있었다면 국가를 상대로 별도의 손해배상(위자료) 청구소송을 낼 수도 있다.
그러나 민법상 취소권의 소멸시효는 취소의 원인을 안 날로부터 3년으로 규정돼 있어(제146조) 강박에 의해 주식을 양도했더라도 이미 8년이 지나버려 취소 청구소송은 낼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하지만 법조계에서는 언론통폐합조치 당시의 강박개념을 「고도의 강박」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초법규적인 고도의 강박상태에서 이루어진 의사표시이므로 시효가 없는 당연 무효(민법제103조)로 보아야하고 따라서 지금도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소송사례=85년 전격 해체된 국제그룹 전 회장 양정모씨(67)는 지난 4월 『주식 및 경영권 양도에 관한 계약은 강압에 의해 일방적으로 이루어진 원인무효』라고 주장, 한일합섬을 상대로 서울민사지법에 주식인도 청구소송을 냈다.
양씨는 『2·12총선 직후인 85년 2월 21일 주거래은행이던 제일은행 이필선 행장이 한마디 사전 통고도 없이 소「국제그룹을 정리할 생각이나 재산처분권 위임장에 도장을 찍으라」고 종용해 동의를 거부하자 「이미 방침이 정해졌다. 계속 버티면 다친다」고 압력을 가해와 어쩔 수 없이 위임장에 도장을 찍었다』며 『당시 한일합섬이 인수해간 주식 1천2백여만주를 되돌려 달라』고 요구했다.
또 지난 3월 전 민정당대표위원 정내혁씨는 국가를 상대로 『84년 6월 국가는 문형태씨가 낸 투서를 이용, 갖가지 방법으로 협박해 본인의사에 반해 재산을 국가에 헌납토록 했으므로 마땅히 이를 되돌려 주어야한다』며 부인 주숙씨 명의로 54억원 상당 재산의 반환을 요구하는 소송을 서울 민사지법에 냈다.
정씨는 『당시 이상재씨 등 민정당 간부들이 번갈아 찾아와 재산헌납을 강요했으며 8월 9일 연행하려고 해 다음날 3남을 보내 재무부국고국에서 작성한 서류에 도장을 찍게 했다』고 주장했다.
◇구제방안=법원의 한 간부는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내려진 언론통폐합조치에 대해 정부가 사법적 심사를 통해 해결하려하는 것은 잘못』이라며 『정부의 적극적인 대안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간부는 또 『단순한 민사쟁송의 차원을 벗어나는 언론문제를 사법부 심판에 맡긴다면 사법권 독립이나 언론자유의 신장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강조했다.
최종백 변호사는 『방송통폐합처럼 공영기관에 회사가 넘어갈 경우는 사정이 다르지만 개인간의 계약에 의해 주식이 양도된 언론사에 대한 무조건적인 원상회복은 또 다른 권리 박탈을 가져오게 된다』며 『정부가 이 문제를 사법적 판단에 맡길 것이 아니라 특별법을 만들어 적절히 보상해 주는 방안도 검토해 볼만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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