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승자의 저주에 빠지나…험난한 북·미 협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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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성락의 퍼스펙티브] 싱가포르 후유증 

싱가포르 회담 이후 북·미 간 비핵화 논의가 난항이다. 북한이 선 신뢰 조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북한 입장에서는 당연한 요구다. 북한은 싱가포르에서 그렇게 합의되었다고 믿고 있다. 무슨 말인가?

북·미 합의의 8할이 북한 주장 #트럼프 성공 연연해 성급하게 합의 #과거 우발적 정상 합의 파기했듯 #미국은 문안대로 이행하지 않을 것 #북한이 북·미 합의에 도취할수록 #비핵화 협상 어려워지고 #파국으로 치달을 가능성 있어 #한국은 이를 막을 방법 고심해야

싱가포르 공동성명으로 돌아가 보자. 8할이 북한 주장이다. 관통하는 메시지와 전개 방식이 압도적으로 북한 시각을 반영한다. 북한 초안에 미국이 약간의 수정을 가한 것처럼 보인다.

구체적으로 보면 주 메시지는 ‘새로운 북·미 관계’ 구축이다. 한 페이지 남짓한 성명에 ‘새로운 북·미 관계’가 무려 5번 나온다. 평화도 4번 나온다. 두 키워드가 중언부언 되니 이게 과연 정상 성명의 격에 맞는 문장인지 믿기지 않을 정도다. 그만큼 북한으로서는 이 개념을 확실히 하고 싶었던 듯하다. 그래서 남세스럽더라도 접착제로 붙이고 대못을 박고도 또 철갑을 둘러친 것 같다.

한편 비핵화는 2번 언급되고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언급 횟수보다 언급 방식이다. 미국이 기존의 비핵화 추진 방식을 바꾼 것처럼 쓰여 있다. 종래 미국은 비핵화 진전에 따라 관계 개선과 안전 보장을 추진한다고 해왔고, 북한은 관계 개선과 신뢰 구축이 먼저라고 해왔다. 그런데 성명에서 두 정상은 새로운 북·미 관계가 한반도 평화 번영에 기여하고, 신뢰 구축이 비핵화를 증진한다는 데 확신한다고 적고 있다. 이 논리가 성명 전반에 점철되어 있다. 요컨대 싱가포르 성명은 평화와 신뢰를 구축하여 새로운 북·미 관계를 열고 그 과정에서 비핵화를 해나가자는 선언이다. 북한의 주장에 미국이 동조한 선언인 셈이다.

비핵화 논의가 난항인 이유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더구나 그 비핵화는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다. 북한의 개념이다. 북한뿐 아니라 한·미도 비핵화 관련 조처를 하여 한반도 전체가 비핵화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북한만 완전히 비핵화하라는 요구는 한반도의 불완전한 비핵화로서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북한은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CVID)를 강도적 요구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합의가 나오기까지 경위를 보면 북한이 느낄 성취감의 일단을 이해할 수 있다. 북·미는 사전 몇 달간 막후 협상을 하였다. 그 후 판문점에서 6차례 문안 협상을 했으며, 그것으로 모자라 싱가포르 회담 당일 새벽까지 문안 조정을 했다. 그러나 북한은 비핵화의 개념에 대한 기존 입장을 지켜냈고, 자기식의 비핵화 접근 방법에 대한 미국의 동조까지 얻어냈다. 이처럼 치열한 담판 끝에 원하는 합의문을 만들었으니 외교대첩으로 여길 만하다.

과거에도 북한은 대미 협상에서 큰 성과를 거둔 적이 있지만, 비중 면에서 싱가포르 합의에 비교할 바는 못 된다. 그간 북한은 1993년 6월 11일 갈루치·강석주 간 뉴욕회담 합의문을 북·미 관계 40여년 역사상 최고의 문서라고 불렀다. 당시 미국은 북한의 핵확산금지협정(NPT) 탈퇴 과정을 중단시키기 위해 거의 모든 북한 측 요구를 수용하였다. 이제 북한은 최고지도자가 직접 담판하고 서명한 싱가포르 성명을 북·미 관계 70년 역사상 최고의 문서라고 여길 것이다.

물론 미국에 북한의 접근 방식에 동조하느냐고 물으면 부인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북한이 트럼프 대통령과 그렇게 합의했다고 믿는다는 점이다. 공동성명에 그렇게 쓰여 있으니 북한의 인식이 틀렸다고 할 수도 없다.

성급한 북·미 정상 합의 후유증

그러면 미국은 왜 이러한 합의를 했을까? 무엇보다도 트럼프가 회담을 성공으로 갈음하고 협상에 기회를 부여하기로 결단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정치적 스캔들과 중간선거를 앞둔 그는 회담을 성공적 이벤트로 만들고 싶어 했을 법하다.

북한이 이러한 사정을 꿰뚫어 보고 시종 강수로 나왔다고 보아야 한다. 성공적 행사를 만들어내야 하는 트럼프로서는 북한이 문안 협상에서 완강히 버틸 때 대안이 없었을 것이다. 공동성명을 포기하면 회담 실패로 비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트럼프는 문안 협상에서 호의를 베풀어 합의를 해주고, 후속 협상에 동력을 부여하는 길을 택하였다. 그는 정상 간 신뢰가 구축되었으니 후속 협상을 기대할 수 있다고 본 것 같다.

그러나 북한은 정상 간 담판에서 승리했다고 보고 핵 문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강화할 판이었다. 후속 협상이 쉽지 않을 것을 예측하게 하는 대목이다. 북한은 앞으로 중점적으로 논의할 일은 관계 개선과 신뢰 구축이며, 여기에 진전이 있어야 비핵화도 진전할 수 있다는 것이 싱가포르 합의 정신이라고 믿게 되었다. 이것이 의도했든 아니든 미국이 싱가포르에서 북한에 심어준 인식이자, 키워준 기대이다. 북한은 이를 최대한 활용할 것이다. 두고두고 미국이 감당해야 할 업보라 아니할 수 없다.

미국의 업장은 이미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세 번째 방북을 마치고 떠난 직후 북한은 비난을 쏟아냈다. 요지는 왜 폼페이오는 정상이 합의한 새 방식을 버리고 낡은 방식으로 돌아갔으며, 관계 개선, 신뢰 조성, 평화체제 등 우선적 이슈를 버리고 강도적인 비핵화 요구만 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김정은 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내 싱가포르 성명의 이행과 관계 개선을 주문하고, 트럼프의 노력에 기대를 표하였다. 친서의 숨은 메시지는 아랫것들을 잘 단속하여 정상 간 합의가 변질하지 않도록 해달라는 당부였다. 비핵화에 대해서는 일언반구가 없었다. 싱가포르 이후 미국이 치러야 할 업장의 서막이 이렇게 열렸다.

싱가포르 합의 집착하면 협상 어려워져

우려되는 점은 북한이 싱가포르 성공에 집착할수록 협상은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미국은 북한의 기대대로 움직일 수 없고, 북한은 최고 존엄이 이룩한 신성한 합의를 해태하는 미국을 용납할 수 없다. 분란이 예상된다. 결국 파국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 그런데 그런 결말은 북한을 포함한 모두에게 해로운 일이다. 이른바 싱가포르 승리 인식이 초래할 딜레마이고, 이것이 지금 우리가 처한 문제의 핵심이다.

왜 미국은 싱가포르 합의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말인가? 총론적으로 미국처럼 선민의식을 가진 강대국이 북한과 같이 일탈을 해온 작은 나라에 대해 계속 선의의 조처를 해 비핵화를 유도하기는 어렵다. 각론으로 보더라도 미국 정부 내에 싱가포르 성명을 문자 그대로 이행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미국 관리들에게 싱가포르 성명은 특이한 대통령의 즉흥적인 행태가 빚어낸 결과물일 뿐이다. 트럼프 대통령마저도 북한의 기대대로 움직여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트럼프, 중간선거 이후 대북 강수 가능

이렇게 말하면 정상 간 합의를 지나치게 경시하는 것처럼 들리겠으나, 냉전기 미·소 정상 간에도 우발적으로 이루어진 합의가 실제 지켜지지 않은 사례는 많다. 더욱이 트럼프 행정부의 경우 말과 행동 간에 편차가 크다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파국을 피하기 위한 하나의 방안은 결자해지 식으로 미국이 다시 정상회담을 하여 싱가포르의 업장을 해소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공 가능성은 작다. 북한이 선점한 유리한 고지를 내놓을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현실적으로 개연성이 큰 시나리오는 이렇다. 당분간 트럼프 대통령은 협상을 독려하고 미국 조야는 비핵화 요구를 내세우는 가운데 대북 강압 조치와 협상이 병행되는 것이다. 유사 사례가 미·러 관계에서 관찰된다. 트럼프는 미·러 관계 개선을 위해 유연한 대응을 선호하면서도 미국 정부 차원의 대러 강성 조치를 막지 않고 있다.

북한에 대해 비슷한 상황이 생길 수 있다. 싱가포르 이전이라면 이런 식 병행 접근도 시도함직하지만, 북한이 싱가포르에서 기대치를 높인 이상 반발이 클 것이다. 협상은 답보하고 이윽고 트럼프도 정부 내 강성 흐름에 합류할 소지가 크다. 당초 깊은 고민 없이 싱가포르 합의문을 수용한 트럼프는 동일한 심사로 싱가포르 성명에서 벗어나는 결정을 할 수 있다. 중간선거 결과에 따라 트럼프의 강성 선회 시점은 앞당겨질 수 있다. 그러면 트럼프에 기대하던 북한은 합의 파기라며 격하게 나올 것이다. 협상은 좌초하고 도발이 있을 것이다. 그때 트럼프가 어떤 강수를 쓸지는 예측 불가다.

한국, 파국 막기 위해 고민해야

마지막으로 거론하고 싶은 시나리오는 북한이 이러한 전후 사정을 현명하게 헤아려 합의문에 집착하지 않고 유연한 자세를 취할 경우이다. 그러나 이 또한 개연성은 적다. 북한이 스스로 승리의 주술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북한은 교조적이다.

전망이 이렇다면 우리로서는 파국을 피하고 비핵화를 진전시키기 위해 무엇을 할지 고심해야 할 것이다. 대처 방안을 모색하는 작업은 현 국면의 심각성과 문제의 연원을 냉정히 인식하는 지점에서만 시작될 수 있다.

싱가포르 합의는 그대로 되기에는 북한에 너무 좋은 것이었다. 그래서 이행되기 어렵다. 그런데도 북한은 이에 집착하고 있다. 미국은 별 의미를 두지 않고 있다. 이대로라면 앞길은 어둡다. 과연 큰 분란 없이 싱가포르의 주술을 넘을 방안이 나올지, 모두가 피해자가 될 파국을 감수하고서야 이 주술을 벗어날지 앞으로 수개월이 말해줄 것이다.

위성락 서울대 객원교수·전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리셋 코리아 외교안보분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