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국 대소 접근 미국선 못 마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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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고르바초프」는 공산당 서기장의 페레스트로이카로 일컬어지는 개혁·개방정책으로 소련과의 경제협력의 문이 열리면서 대소접근의 완급·범위 등을 놓고 미국과 유럽국간에 알력이 노출되고 있다.
이는 최근 유럽국가들이 「고르바초프」의 개방정책에 발맞춰 앞을 다투어 소련에 거액의 차관을 제공하고 서독 같은 나라는 소련에 원자력 발전소 건설에 협조하기로, 합의하는 등 유럽국가들의 대소접근이 활발히 진행되면서 빚어지고 있다.
서독·프랑스·영국·일본 등의 상업은행들은 지난 10일 사이 소련의 대외관계 은행과 1백억 달러에 이르는 차관을 제공키로 합의했거나 협상을 진행중이다.
서독이 이번 「콜」수상의 소련 방문 중 16억7천만 달러, 이탈리아 은행이 7억7천5백만 달러, 영국이 26억 달러를 제공키로 합의했고 프랑스와 일본이 곧 20억 달러씩의 차관제공을 할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오스트리아와 스위스 등의 은행들이 10억 달러를 제공할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이 같은 액수는 서방세계가 지난 85∼87년 사이 3년 동안 소련에 제공한 신규차관 80억 달러를 훨씬 웃도는 것이며 소련이 올해 석유·가스·무기와 금 등을 팔아 얻은 것으로 예상되는 3백억 달러의 해외수입의 3분의1을 차지한다.
소련은 이 같은 서방으로부터의 차관도입이 이데올로기적 대립정책에 따른 군비경쟁으로 약화된 경제를 부흥시켜 국민생활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써질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섬유·신발·식료품·자동차공장 건설에 쓸 예정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소련 당국은 현재 연산 1백40만대의 자동차생산능력을 배가시키는 정책을 검토 중에 있다.
이 같은 서유럽국가들의 대소차관러시에 미국은 펄쩍 뛰고 있다. 상원은 이 같은 차관이 미국의 안보에 미칠 영향을 검토하도록 대통령에게 요구했고, 국방성은 미국의 이익을 해치는 소련의 세계전략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미국의 랜드연구소는 소련이 83년 리비아·쿠바·베트남 등에 1백50억 달러 이상의 군사원조를 한 사실을 지적했다.
한마디로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으로 유럽에서 마구 흘러 들어가는 돈이 소련의 군사력유지나 동맹국 지원에 쓰여질 것을 미국은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미국은 24개 선진국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개입을 요청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민주·공화 두 당의 대통령후보들도 이 같은 대소차관과 서방의 안보약화관계에 우려를 표명했다. 특히 공화당은 대소차관이 소련으로 하여금 허약한 경제를 일으켜 세우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돈을 제공해주고 미국의 기술을 사들이는데 이용될 것이라면서 차관의 즉각 중단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에 대해 유럽측은 이 같은 차관은 은행간의 민간협정에 바탕을 둔 것이며 소련의 개혁노력에 따른 진지한 검토 끝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맞서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헬무트·콜」수상의 소련 방문과 때맞춰 한 서독회사가 소련에 고온 원자력발전소(발전량 2백 메가와트)를 짓기로 소련과 협정을 맺을 것이란 발표는 미국을 긴장시켰다.
약 5억6천만 달러를 들여 볼가강변에 세워질 이 고온원자력 발전소는 지금까지 전시용으로 미국에 1개, 서독에 2개 등 세계적으로 3개밖에 개발되지 않은 최첨단 핵 기술이 요구되는 방전소다.
미국은 즉각 공식반응을 보이고 있지 않으나 전략적으로 중요한 핵 기술의 공산권 수출이 대 공산권수출통체기구(COCOM)에 의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이 기구에서 이 거래가 소련군사력강화에 도움이 될 것이란 점을 주장할 것으로 보여 큰 논란이 예상된다. 서방의 전략기술은 이 기구 16개 회원국 모두를 만족시켜야 수줄이 허용된다.
최근 급속히 확대되고 있는 서방-소간의 거래는 분명 소련내의 정치적 변화에 기인하나 이에 대한 의견은 국가마다 다르다.
아직 보수주의 물결 속에 소련과의 대립적 분위기가 팽배해 있는 미국과 소련의 개방정책을 새로운 시장과 기회로 보고 더 나아가서는 유럽의 긴장완화에 이용하려는 유럽국가들의 이해관계의 골은 소련의 개방정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면 더 깊어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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