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탄의 단계는 지났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다? 피해자는 전기고문 8번, 물 고문 2번을 당한 때와 장소, 그리고 가해자의 이름까지 대고 있는데 가해자로 지목 당한 경찰 간부는 피해자의 얼굴도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이미 박종철군 물 고문 치사사건으로 악명을 떨친바 있는 남영동 대공분실은 『고문하는 장소가 아니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국정감사를 통해 또 한차례 벌어지고 있는 이와 같은 말의 유희를 보면서 우리는 또 한번 좌절감과 분노를 느낀다.
우리 주변에는 김근태씨의 고문주장 외에도 여러 사람들의 고문피해 주장들이 여러 간행물을 통해 널리 알려져 있다.
부천 성 고문사건, 화성 살인사건에 연루되어 고문을 당하다가 뇌사한 명노열군의 경우 등은 사직당국에 의해 확인된 고문 사례다.
72일 동안 불법 감금당한 후 「반 국가단체 찬양고무」혐의로 기소되었다가 무죄 방면된 김성학씨의 경우는 지금도 고문부분에 대한 재정심리가 진행중이다.
이와 같은 사례로 미루어 5공 시대에 고문이 광범하게 자행되었고 그 이후에도 그 관성이 중단되지 않았으리라는 개연성을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자는 있어도 가해자는 없는 고문관계 증언의 헛바퀴 돌림이 다시 「눈 가리고 아옹」식의 추한 자태를 드러내고있다.
엄격히 따져보면 밀실에서 자행되는 고문행위에 대해서는 수사관들이 즐겨 쓰는 이른바 「심증」은 있어도 물증을 제시하기 어렵다.
가해자의 「자백」을 얻어내는 것은 사건의 성질상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고문을 근절하려는 제도적 장치도 당사자들의 성실한 협조 없이는 효과가 없다. 헌법의 고문금지 조항을 보강하기 위해 고문 행위를 가중 처벌하는 법이 발효된 이래 여러 차례 고문 사례가 또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이 법이 적용된 경우는 단 한번도 없었다.
박종철군 사건 후 총리실 직속으로 인권보호 특별위원회가 설치된 적도 있지만 유명무실했음을 모두가 알고 있다.
이와 같은 선례들은 공권력에 의해 저질러지는 고문이 공권력 자체의 기능으로 방지되기를 기대하기가 어렵다는 결론을 불가피하게 해준다.
따라서 우리는 사회가 주축이 되는 독립된 상설 고문방지기구가 마련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는다. 그런 성격의 기구는 독립된 사법권과 함께 공권력의 편의주의에 대한 신빙성 있는 견제기능을 가질 수 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기구가 맡아야할 첫 과제는 지금까지 미제상태로 남아 있는 모든 고문사례의 진상을 가능한 수준까지 최선을 다해 파악하는 일이어야 한다.
고문문제는 이제 비분강개만으로 해결될 수 없고 공념불의「진실촉구」만으로는 치유할 수 없는 단계에 와 있다. 현실적으로 무엇이 가능하고 무엇이 불가능한지를 냉철히 가려내어 가능한 목표에 대한 구체적인 접근노력이 공권력으로부터 독립된 기구에 의해 집중적으로 실시되어야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만 고문문제로 실추된 공권력의 도덕성이 회복될 수 있고, 우리사회는 고문이라는 악몽을 치유하고 건전한 사회의 생기를 다시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