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재사진전문기자의네모세상] 하동 악양 들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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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토지'의 배경이 된 하동 평사리에서 내려다본 악양 들판엔 보리가 너울 춤춘다. 한껏 웃자란 보리가 바람의 장단을 타며 연초록을 물결처럼 퍼뜨리니 이내 길손도 초록에 물든다. 산으로 에둘린 들판이지만 그 넓이가 오십만 평에다 자른 두부처럼 반듯하니 숨이 탁 트인다.

못자리를 내느라 무논을 갈아엎는 농부의 뒤를 졸졸 따르는 백로는 미꾸라지며 벌레를 쪼느라 오가는 사람 안중 없고, 보리밭을 날아오른 꼬마물떼새의 지저귐이 보리피리 소리처럼 청량하게 들녘에 울려 퍼진다. 논 일을 끝낸 농부가 바지춤을 툭툭 털며 나오자 어느 틈에 날아온 산비둘기 한 쌍이 논두렁에 떨어진 볍씨를 옹골차게 쫀다.

"예전 같으면 볍씨 떨어뜨릴 턱이 없었지예. 흔히 말하는 보릿고개 아입니꺼. 당시엔 곡식 한 톨이 목숨만큼 귀했지예. 들판에서 캐먹을 거 다 먹고 나면 다들 쑥 캐러 산으로 올라갔습니더. 그걸로 할머니가 쑥버무리를 하시면 부뚜막에 쪼그리고 앉아 기다리며 침으로 허기를 때웠지예." 날짐승들 먹으라고 남겨둔 볍씨는 아니지만 흘낏 눈길 한번 주고 씩 웃는 농부의 본새가 들녘만큼이나 넉넉하다.

악양 들판을 찍으려면 이른 시간 고소산성 중턱에 자리 잡는 게 좋다. 왼쪽에서 반 역광으로 비스듬히 비춰오는 빛이 고랑을 입체적으로 보이게 한다.

여기서 망원렌즈를 사용하면 논길의 선이 깔끔하게 정리된 사진을, 광각 렌즈를 사용하면 악양 들판과 섬진강이 어우러진 사진을 담을 수 있다. 사진은 기술보다 발품으로 장소를 찾는 게 중요하다. 무턱대고 찍기보다 빛의 상태와 시간 및 주변 환경을 미리 알고 준비하는 게 우선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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