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완의광고로보는세상] 저속과 파격 사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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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9년 입센의 연극 '인형의 집'이 코펜하겐에서 초연되자 유럽 사회는 충격에 휩싸였다. 행복한 집안의 사랑받는 아내이자 착한 엄마였던 노라가 "아내이고 어머니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 살겠다"면서 애원하는 남편과 아이들을 뿌리치며 집을 나갔기 때문이다. 런던과 파리에서 이 연극을 보기 위해서는 10년 이상을 기다려야 할 정도로 연극은 폭발적 반응을 일으켰다. 사실 우리가 막연하게 느끼는 것과는 달리, 오히려 서구가 여권 문제에 관한 한 동양보다 보수적인 것 같다. 미국에서 여성이 투표를 할 수 있었던 것도 1920년부터였으니까.

동물들은 짝짓기를 할 때 좋은 냄새를 풍겨 상대를 유혹한다고 하는데 인간에게서는 그런 능력이 퇴화된 것 같다. 그저 구혼을 할 때 꽃다발을 들고 가는 정도다. 우리가 사향노루가 아니기 때문에 등장한 것이 바로 향수다. 그래서 향수 광고는 여성의 아름다움이나 꿈이 남성의 성적 팬터지를 자극하는 데 있다는 점을 은연중에 강조해 왔다. "내가 잘 때 몸에 걸치는 것이라고는 샤넬 No.5 뿐이에요"라는 마릴린 먼로의 유명한 대사는 향수 광고에서의 여성의 역할을 한마디로 요약해 주고 있다.

그런데 레브론 화장품의 향수 '찰리'가 1970년대부터 상당히 이단적인 광고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우선 찰리 광고의 모델은 유명한 여배우가 아니다. 고혹적인 드레스를 입지도 않았다. 옷을 벗지도 않았다. 심지어 바지 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하기도 하고 회사에 일하러 가기도 한다. 아예 뒷모습만 보이기도 한다. 남자 없이도 잘해 나갈 것 같은 이런 찰리 여인상은 당시 집 나가는 노라만큼이나 충격적이었다.

88년 찰리 광고를 자세히 살펴보자. 남자와 여자가 길을 가고 있다. 손에 든 서류 가방과 복장으로 봐서 이들은 아주 중요한 프레젠테이션을 마치고 회사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다. 남자의 활짝 웃는 옆얼굴로 봐서 프레젠테이션은 아주 만족스러웠던 것 같다. 여자가 키가 더 크다. 여자가 더 높은 직위에 있음을 암시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의 손이 남자의 엉덩이를 두드리고 있다. 아마 "오늘 잘했어!" 라고 격려를 하는 것이리라.

뉴욕타임스는 그러나 '저속한 취향'이라는 이유로 이 광고를 게재하길 거부했다. 서울 올림픽이 열렸던 88년은 그다지 먼 과거가 아니다. 게다가 미국에서 벌어진 이야기다. 이러한 사실은 뭘 의미하는 것일까.

과거에 비해 훨씬 많은 여성 정치인이 활약하고 있는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러나 남자들의 의식이 아직도 '코코 샤넬' 수준에 있다면, 진정한 찰리 여인들의 등장은 여전히 먼 얘기일 것이다. 아니 어쩌면 여성 정치인들 자신이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인지도 모른다.

김동완 그레이프커뮤니케이션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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