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에 군기는 있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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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서울올림픽은 한미 국민 감정을 악화시킨 하나의 계기였다. 올림픽기간 중 미국인과 미군들이 벌인 무질서·폭행·절도행위와 NBC방송의 편파보도 때문이었다.
이 일련의 사건 때문에 표면적 현상에 불과했던 한국민의 대미감정마찰이 구조적인 반미주의로 변질될 위험은 없을까, 운동권 일부에 편재해 있던 반미감정이 대중적으로 확산될 소지를 준 것은 아닐까해서 양식 있는 많은 사람들이 걱정을 했다.
바로 이럴 때 다시 한국민의 감정을 건드린 또 하나의 사건이 미군병사들에 의해 발생했다. 16일 새벽 서울 이태원에서 미군 4명이 한국인택시를 걷어차고 이에 항의하는 운전사에 욕설·폭행한 것이 계기가 되어 시민 2백명과 미군 40명이 집단 난투극을 벌였다. 이 싸움에서 한국인 20명과 미군 10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 사건은 몇 가지 점에서 주의를 끈다.
첫째는, 사건발단에서 엿볼 수 있는 미군병사들의 의식이다. 미군병사들은 길을 지나가는 택시를 정당한 이유 없이 구둣발로 걷어찼다.
그들은 점령군이라고 스스로를 착각하고 있거나 미국인이라는 우월감 또는 한국인에 대한 경멸심이 깔려있다는 것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둘째는, 연행된 미군의 신변처리문제다. 그들은 한미행협에 규정된 「공무집행 중」의 면책범위를 벗어나 있었다. 더구나 한국인의 신체와 재산에 피해를 주었는데도 경찰은 사고경위만을 조사한 뒤 쉽게 미군헌병대에 인도했다. 이것은 주권국가로서의 조사권 포기나 다름없다.
이번 집단난투극사건은 그것이 가져올 두 나라 국민감정의 악화라는 관점에서 냉정히 처리돼야 한다.
8·15이후 우리에게 미국은 「해방자」였다. 6·25이후엔 혈맹으로 다져진 「영원한 우방」으로 묘사돼 왔다. 그것은 대체로 우리가 일방적으로 원조만 받고 전쟁위협이 심했던 냉전시대의 인식구조였다.
그러나 시대는 바뀌었다. 전쟁위기는 감소되고 경제관계는 원조가 아니라 협력관계로 바뀌었다. 한미를 둘러싼 정세도 개방과 탈 이념으로 옮겨가고 있다. 그럼에도 주한미군은 아직껏 냉전시대의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
이번 난투극사건을 접하고 한미 국민감정의 악화를 막기 위해 다음 두 가지를 제언한다.
하나는 주한미군의 군기 확립이다. 외국에 주둔한 문명국 군대가 어떻게 민폐를 끼칠 수 있는가. 더구나 뉴욕 슬럼가의 폭력배를 연상케 하는 행위를 주재국 수도의 중심가에서 벌일 수 있는 일인가. 미군지휘부의 경각심을 기대한다.
다음은 냉전시대에 제정된 한미행협의 개정이다. 그것은 전시체제에나 있을 수 있는 잠정적 조약이다. 이것이 변화된 현실에 맞게 합리적으로 개정되지 않는 한 미군의 횡포로 인한 국민감정의 악화는 쉽사리 막기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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