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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부모를 죽인 까닭은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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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2호 30면

연극 ‘손님들’

가족은 행복의 통로인가, 불행의 씨앗인가-. 잊을만 하면 들려오는 존속 살해사건을 대할 때마다 드는 의문이다. 지난해 차범석희곡상과 동아연극상 작품상·희곡상·신인연출상 등 주요 연극상을 휩쓸고 올해 국립극단의 기획초청공연 무대에까지 선, 요즘 가장 ‘핫한’ 연극 ‘손님들’이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작품 자체보다 창작진의 면모가 먼저 눈길을 끈다. 2015년 국제공연예술제(SPAF) 당시 세월호를 연상시키는 팝업씨어터 ‘이 아이’에 대한 주최측의 공연방해로 예술인 검열 사태에 불을 붙였던 20대 젊은 연출가 김정과, 검열 국면에 젊은 연극인들의 멘토 역할을 자처해 온 기성세대 고연옥 작가가 처음으로 콤비를 이룬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서사의 완결성보다 형식적 실험에 치우치는 요즘 젊은 연극인들의 창작 경향과는 달리 전통적인 연극성에 기반한 무대다. 빈 무대에서 과장된 분장을 한 배우들이 그로테스크한 연기로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한편의 잔혹극이랄까. 암울한 스토리를 타자화시키는 우스꽝스러운 캐릭터들이 판소리, 뮤지컬 넘버 등 개인기를 선보이고 한바탕 댄스파티를 벌이는 지점들에 연출의 감각이 반짝이긴 하지만, 그보다 짙게 배어나오는 게 고연옥 작가의 색깔이다.

실제 일어난 범죄사건을 소재로 현대사회의 부조리한 이면을 고발해온 고연옥 작가의 요즘 관심사는 존속살해인 것 같다. 전작 ‘처의 감각’에서는 엄마가 아이를 죽이더니, ‘손님들’에선 아이가 부모를 죽인다. 왜 이렇게 끔찍한 이야기를 하나 싶지만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현실일 뿐이다. 경찰청 범죄통계에 의하면 매년 벌어지는 400여 건의 살인 사건 중 30%가 친족간 범죄고, 친구나 애인 살해가 약 15%로 그 뒤를 잇는다. 통계가 말해주는 것은 일상을 공유하며 즐거움과 친밀감의 근원으로 인식되는 가족의 존재가 역으로 좌절과 상처의 근원일 수도 있다는 불편한 진실이다.

2000년 발생한 이은석 사건을 모티브 삼은 ‘손님들’은 소년이 부모를 살해한 행위보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고통스러운 현실과 내면의 외로움에 확대경을 댄다. 소년의 가족은 성공만을 지향해 온 전형적인 20세기 가정을 대변한다. 새어머니 아래서 불행하게 자랐지만 육사에 진학해 군인으로 자수성가한 권위적인 아빠와 나름 귀하게 자라 영부인을 꿈꾸던 엄마는 왠일인지 인생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작은 아파트에 사는 걸 치욕으로 여기며 매일 싸운다. 부부의 화풀이 대상은 기대에 못미치는 아들이다. “한글을 배우던 네 살 때부터 맞았다”는 소년의 일상은 부모의 경쟁적인 학대로 점철돼 있다.

이런 집구석으로 소년이 손님들을 초대한 건 혹시나 “손님들과 잘 지낼 수 있다면 우리도 달라지지 않을까” 싶어서다. 사회성이 모자란 부모가 손님들과 어울리며 소통의 기술을 배울 것이란 기대다. 그런데 소년이 초대한 손님들은 세상에서 가장 소외된 존재들이다. 아파트 단지에서 엄마에게 버려진 길냥이, 초등학교 화단에서 외면받고 있는 동상, 뒷산 무덤가에 사는 사람인지 귀신인지 모를 노숙자다. 소년의 분신과도 같은 이 하찮은 손님들을 성공지상주의자인 부모가 거들떠볼 리 없다. 아니, 애초에 이 손님 초대는 환상이다. 부모는 이미 소년이 휘두른 도끼에 희생된 상태다. 살아있는 부모의 폭력을 감당할 수 없었던 소년은 “제대로 살게 해주기 위해서” 부모를 죽인 뒤 화목과 소통을 찬찬히 가르치려 한 것이다.

사건 이후 시작된 연극은 사건으로 되돌아갔다가 다시 시작에서 막을 내리고, 소년은 이 돌고도는 환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 빨간 후드티를 입은 귀여운 소녀를 만나면 평범한 또래처럼 ‘공기가 달라질 만큼’ 기분이 좋아지지만, 집안에 방치된 비극의 굴레에서 헤어날 길이 없기에 결코 소녀와 즐거운 여행을 떠날 수 없다. 소년에게 가족은 불행의 씨앗일 뿐인 것이다.

희망이라곤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 갑갑한 무대를 앞에 두고 가족이라는 신화를 생각한다. 왜 가족은 피를 나눴다는 이유만으로 행복한 울타리를 향해야 하는가. 어쩌면 소년의 희망은 울타리 바깥에 있었는데 말이다. 어차피 모두가 꿈꾸는 행복한 가정이란 환상일 뿐인지도 모른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갖지 못했다고 무능한 부모 탓, 못난 자식 탓으로 돌리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내 가족의 초상은 내가 그려가는 것일 테니. ●

기간: 7월 15일까지
장소: 국립극단 소극장판
문의: 1644-2003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국립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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