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대통령 '사학법 양보' 권고 … 열린우리당 거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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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권 내 혼선 비춰질까 공식 브리핑은 안 해

청와대 참모들은 노무현 대통령이 주문한 '여당의 (사학법 개정안) 대승적 양보'가 열린우리당에 의해 거부된 데 대해 당혹해 하는 분위기다.

특히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이 "사학법의 근간 훼손은 있을 수 없다"고 한 데 대해 충격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대통령의 주문을 바로 다음날 당 대표가 수용하지 않겠다고 한 것은 예전 기준으론 '여당의 반란'이다.

정태호 청와대 대변인은 "국정 최고책임자로서의 고심을 여야에 얘기한 것일 뿐"이라고 했다. 그는 "사학법만 지칭해 한 얘기도 아니고 입법 현황을 포괄적으로 어떻게 풀 것인지에 대한 얘기였다"고 설명했다. "구체적인 원내 전략, 협상은 청와대가 간여할 수 없는 것 아니냐"는 얘기도 덧붙였다. 청와대는 30일 별도의 회의도, 공식 브리핑도 하지 않았다. 무대응이다. 하지만 외부에는 당.청 갈등이자 여권 내 혼선으로 비춰진다.

여당의 양보를 요청하면서 노 대통령이 가장 기대한 것은 부동산 대책의 입법화였다. 그는 '재건축 개발이익 환수'가 골자인 3.30 관련 대책을 4월 국회에서 입법화해 9월부터 시행한다는 기대를 가져왔다. '보유세.양도세 강화'가 목적이던 지난해 8.30 대책의 입법화에 이어 부동산 투기 근절의 양대 골격을 구축하겠다는 의도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함께 그가 후반기 양대 과제로 천명한 대목이다.

한 참모는 "17대 국회의 2기 원 구성이 논의되는 6월 국회는 한나라당의 7월 전당대회까지 겹쳐 진통이 예상된다"며 "4월 국회가 무산되면 3.30 대책의 입법화는 9월 정기국회로 넘어간다는 게 노 대통령의 우려"라고 전했다.

이런 국면에서 노 대통령이 '여당의 양보' 카드를 꺼냈다는 얘기다. 노 대통령의 의중을 잘 아는 청와대의 핵심 참모는 "대승적인 양보와 결단으로 국정을 잘 이끌어 가겠다는 대통령의 순수한 의도가 받아들여지지 않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는 "이제 독도의 조직적 대응을 위한 동북아역사재단 법안까지 사학법에 묶어 발목을 잡아 온 한나라당이 자신들의 '법안 연좌제'에 대한 입장을 밝혀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지방선거가 목전인 여권의 내홍과 상처를 무릅쓰고서라도 '국회 정상화'를 위한 한나라당의 결단을 압박한 노 대통령의 배수진이란 게 그의 해석이었다.

청와대는 노 대통령이 5월 지방선거 후 탈당하기 위한 여당과의 선 긋기 포석이 아니냐는 관측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여당은 시끄러웠지만 노 대통령은 30일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공을 정치권으로 넘긴 뒤 여론의 흐름을 살펴보는 모양새다.

최훈 기자

지도부 소집 의총서 80% "양보 절대 불가"

지난달 29일 오후 8시 국회의사당 본청 246호실. 열린우리당 국회의원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주말 저녁에 비상 의원총회가 열린 것이다. 안건은 노무현 대통령의 사학법 개정 양보 권고. 정동영 의장을 비롯한 지도부는 굳은 표정으로 일찌감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142명의 소속 의원 중 약 90명이 모였다. 지역구 활동이 많은 토요일이었지만 지도부의 예상보다 참석률이 높았다. 완도(이영호 의원), 제주(김재윤 의원), 광주(김태홍 의원)에서도 올라왔다. 회의는 비공개로 3시간여 동안 진행됐다. 참석자들의 전언에 따르면 약 25명의 의원이 발언을 했다. 유재건.김성곤.이시종 의원 등 서너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대통령의 권고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의견을 밝혔다. 80% 정도가 거부 의사를 분명히 한 것이다. 당내 강경파가 앞장섰다. 정청래 의원은 "(사학법을 재개정하면) 집토끼마저 '산적떼'(한나라당)에게 고스란히 넘어갈 것"이라고 했고, 임종인 의원은 "사학법은 우리당이 유일하게 통과시킨 민주개혁법인데 이를 수정하는 것은 대통령도 망하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이강래.양승조.김재윤.이석현.박영선 의원 등 중도 성향의 의원까지 이에 가세했다. "양보 절대 불가"라는 단호한 입장이 당론으로 정해졌다. 이때가 오후 11시. 3시간 만에 당론이 정리된 셈이다. "의원들 의견이 이번처럼 일치된 일도 드물다"는 얘기가 오갔다.

당은 이날 오전부터 긴박하게 돌아갔다. 김한길 원내대표는 청와대 조찬을 마치고 당의 지방선거 필승결의대회가 열리고 있는 서울 올림픽 역도경기장으로 갔다. 그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정 의장과 김근태 최고위원 등에게 대통령의 발언을 전했다. 김 최고위원은 의원총회 개최를 제의했다. 오후 2시쯤 당은 비상연락망을 가동해 의원들에게 소집명령을 내렸다.

당 지도부는 오후 7시 주요 당직자 30여 명을 불러 대책회의를 열었다. 지도부는 의원총회에서 대통령 제안 수용에 대한 찬성과 반대가 엇갈릴 가능성에 대해 우려를 나타냈지만 참석자 대부분이 "찬성 의견은 극히 드물 것"이라며 지도부를 안심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같은 시간, 강금실 서울시장 예비후보는 사학법 개정 양보 반대 입장을 밝히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개방형 이사제라는 사학법 개정안의 핵심 내용에 후퇴가 있어서는 안 된다"며 "당의 정체성은 지켜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열린우리당의 강경 기류는 30일에도 이어졌다. 정 의장은 "대통령의 국정 표류에 대한 걱정과 고민을 이해하지만 의원 절대 다수의 뜻에 따라 사학법을 그대로 지켜 가겠다"고 말했다. 김 원내대표는 "의총에서 수렴된 의견을 청와대에 전달했다"고 밝혔다.

이상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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