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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쿠르트 아줌마로 변장한 외계인이 지구에 온다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3면

영화 '나와 봄날의 약속'의 백승빈 감독이 25일 중앙일보 스튜디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영화 '나와 봄날의 약속'의 백승빈 감독이 25일 중앙일보 스튜디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종말을 주제로 한 이런 상상은 처음이다. 지난달 28일 개봉한 영화 ‘나와 봄날의 약속’은 지구 멸망 하루 전날 지구에 잠입한 외계인들이 생일을 맞은 네 사람에게 생일선물을 준다는 내용의 SF다. 외계인이 야쿠르트 배달원(이혜영 분), 고물 택시를 모는 기사(김성균 분) 등으로 변장해 찾아온다는 설정이다. 이 영화는 올해 초 네덜란드 로테르담영화제 타이거 국제경쟁부문에 진출했다.

‘나와 봄날의 약속’ 백승빈 감독 #제작비 1억원 저예산 SF영화 #김성균·장영남 등 스타급 출연 #“이 시대 아웃사이더 껴안았다”

순제작비 1억원으로 4년에 걸쳐 어렵사리 완성한 저예산 영화. 김성균·장영남·강하늘·이혜영 등 기성 배우들은 “이런 이야기를 쓴 감독이 궁금하다”며 출연을 결정했다. 영화를 연출한 백승빈(41·사진) 감독은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출신의 신예. KAFA 졸업작품 ‘장례식의 멤버’(2008)로 부산국제영화제 넷팩상을 수상하고, 10년 만에 두 번째 장편으로 돌아온 그를 만났다.

SF 영화론 특이한 제목이다.
“‘어차피 망할 거, 다 같이 잘 망하자. 아름답게!’란 극중 대사가 세상을 보는 제 관점이다. 다 망하고 ‘리셋’하면 새롭게 시작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질문과 희망을 갖고 싶다는 염원을 제목에 담고 싶었다.”
왜 어차피 망한다고 보는 건가.
“왠지 모르게 어릴 적부터 종말이란 주제에 사로잡혀 있었다. 시인과 작가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관심이 많았고, 외로울 땐 상상 속 괴물에게 기댔다. 첫 장편 ‘장례식의 멤버’도 죽음으로 얽힌 가족을 그렸는데, 제 무의식을 많이 반영한 얘기였다.”
미래가 불투명한 영화감독 역의 주연배우 강하늘.

미래가 불투명한 영화감독 역의 주연배우 강하늘.

이번 영화는 어떻게 착안했나.
“첫 장편 이후 오래 준비한 영화들이 여러 번 엎어졌다. 고향 대구로 내려가 영화 일을 계속할지 고민했던 시기에 이 얘기가 떠올랐다. 2014년 12월에 찍기 시작해 여러 제작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영화에 살을 붙여나갔다.”
외계인 대장을 야쿠르트 배달원의 모습으로 설정했는데.
“외계인이 인간세계에 잠입한다면 ‘야쿠르트 아줌마’로 변장할 거라 생각했다. 가장 안전한 모습으로 인간 사회 곳곳에 침투할 수 있으니까(웃음).”

외계인에게 최후의 선물을 받는 네 사람은 우울한 아웃사이더들이다. 낭만주의 영미문학을 가르치지만 한 번도 사랑해본 적 없는 대학교수(김학선 분), 시나리오만 10년째 쓰고 있는 젊은 감독(강하늘 분),  괴물그림에 빠진 왕따 여중생(김소희 분) 등은 모두 백 감독의 분신 같은 캐릭터다.

백 감독은 “저마다 만나는 외계인은 사실 그들이 불러낸 저승사자”라고 설명했다. 그들이 절실하게 원했던 외계인의 선물은 달콤하지만, 대가가 따른다는 점에서다. 예컨대 독박 육아에 지친 가정주부(장영남 분)에겐 대학 시절 여성 인권 동아리 후배 모습의 외계인(이주영 분)이 찾아와 잊고 있던 투쟁 본능을 일깨운다. 그러나 둘은 종국에 치명적인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어두운 이야기지만, 따스한 위로가 섬광처럼 스치는 순간도 있다. “내가 죽으려고 이런 (종말적인) 시나리오만 쓰는 걸까.” 영화에서 한탄하는 무명 감독의 다친 팔에, 외계인 대장은 ‘봄날은 온다’고 적어준다.

“제 영화에 반응하는 관객들을 보며 울컥했어요. 제 영화는 작가주의 영화나 상업영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늘 양극단 사이를 배회하고 있다고 느껴왔거든요. 그런데 저처럼 외로운 사람이 적어도 한 명은 더 있구나, 알게 되며 많은 위안을 받았죠.”

그는 더 큰 제작 규모가 허락된다면, 아일랜드 작가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를 한국 무대로 옮겨보는 게 꿈이다. “영원히 죽지 않는 사람은 과연 행복할까. 이를 질문해보고 싶다”고 했다. 또다시 ‘죽음’이란 화두다. 왜 계속해서 죽음을 파고들까. 이유를 물었더니 그가 가방에서 낡은 노트를 하나 꺼냈다.

“어머니가 남긴 일기장이에요. 제가 20대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며 안겨주신 비밀이 창작의 계기가 됐죠. 1970년대부터 어머니가 쓴 이 일기를 조금씩 꺼내보며 풀리지 않는 비밀에 관한 이야기를 떠올려보곤 합니다. 창작자가 흥미로워지는 건 결국 내가 누구고, 어디서 왔는지를 진정으로 마주하게 될 때니까요.”

글=나원정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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