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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성장 피로감이 사이비 보수의 탈을 벗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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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보수의 길을 묻다 ⑤ 

신세철 전 금감원 조사연구국장

신세철 전 금감원 조사연구국장

한국사회에서 보수와 진보의 주장을 듣다 보면 누가 진짜 보수주의다운 사고를 하는지, 누가 진보주의 시각을 가졌는지 솔직히 혼란스럽다. 지켜야 할 가치와 전통을 옹호하고 지키려는 것이 ‘정통 보수’의 다짐이다. 아무것이나 움켜쥐고 자신들의 이해에 집착하는 것은 건전한 보수가 아니라 ‘수구 꼴통’ 세력이다. 6·13 지방선거 결과는 보수가 무너졌다기보다 ‘사이비 보수의 탈’이 벗겨졌다고 봐야 한다. 이번엔 사이비 보수의 탈이 먼저 벗겨졌지만, 시간이 가면 ‘사이비 진보의 가면’도 벗겨질지 모른다.

나라와 개인 모두 잘 살아야 하는데 #경제 양극화로 보수 성장주의 퇴색 #기업에 돈 쌓이는데 가계는 빚더미 #국민 편안하게 해줄 대안 제시해야

한국인들은 오랫동안 수출 주도 성장의 블랙홀에 빠져 있었다. 분배가 왜곡되고 도덕성과 법질서가 파괴돼도 ‘성장의 이름’으로 각종 부작용이 용인되고 묵인됐다. 가계와 기업이 각자의 이윤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부가가치가 창출되고, 국민경제의 성장과 발전이 잘 살 기회를 제공하는 동기양립(動機兩立) 사회가 돼야 지속적 성장과 발전이 가능해진다. 경제 양극화 심화로 개인과 사회가 더불어 발전하는 동기양립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탓에 보수의 주의·주장이 퇴색됐다.

성장 과정에서 수출 입국(立國)이라는 구호 아래 ‘통화 주권’이 아닌 ‘환율 주권’을 외치며 수출을 독려했다. 성장에 경도된 역대 보수 정권은 수출만 잘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듯이 노골적 고환율 정책을 폈다. 가계는 고물가를 부담하면서도 그냥 말없이 따라갔다. 수출이 잘된다는 뉴스는 귀가 닳도록 들었지만, 막상 수출로 벌어들인 그 많은 달러가 어디로 가는지 몰랐다. 예컨대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2017년까지 국내총생산(GDP)의 절반을 넘는 경상수지 누적 흑자, 즉 8000억 달러(약 894조원)는 모두 어디로 누구에게로 갔나.

성장 피로감이 밀려오다 보니 수출이 과연 국민을 잘살게 해주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시론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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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이 거듭되면서 대기업 집단의 사내 유보금은 계속 늘었지만, 가계와 소상공인들의 부채 규모는 점점 커지고 있다. 최근 한국은행의 금융안정 보고서에 따르면 ‘가계부실 위험지수’가 위험 수준으로 평가된 가구가 127만 가구를 넘어섰다. 이런 상황에서 시중은행의 가중평균 수신금리는 1.29%이고, 대출금리는 3.63%다. 손쉽게 큰 마진을 챙기는 약탈적 금융행태가 계속되고 있다.

국민소득은 3만 달러에 육박한다는데, 소득 하위 20% 가구의 월 평균소득은 겨우 129만원이다. 가구당 평균 2.38명이 이 정도 돈으로 병원비나 금융권 채무 이자 같은 비소비 지출을 부담하고 나서 어떻게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을까. “파이를 크게 키운 뒤에 같이 나누자”며 보수 정권이 경제개발 초기부터 내세운 오랜 주장과 설득이 허언(虛言)이 되면서 보수는 외면받기 시작했다고 본다.

‘한강의 기적’을 이뤘다는 나라에서 교육·주거·고용·노후 등 4대 불안에다 도덕 불감증까지 만연해 있다. 서로 상관관계가 깊은 4대 불안은 승자독식(勝者獨食)의 산업구조, 문어발 경영구조에 따른 빈부 격차의 산물이다. 무엇보다 경제성장에 상응해 사회보장제도가 뒷받침되지 못한 까닭에 4대 불안이 더 커지고 있다. 직장인이든 자영업자든 요즘 저녁이 있는 여유로운 삶은커녕 불안과 번민으로 밤잠을 설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보수는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했다. 보수를 표방한 전직 대통령들은 줄줄이 감옥으로 갔다. “경제를 살리겠다”는 사탕발림으로 유권자를 현혹했던 사이비 보수 정치인들의 민낯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면서 국민이 느끼는 염증이 커졌다. 경제적 피로감에 더해 도덕적으로도 지친 한국인에게 이제 혁신적 새바람이 필요하다.

모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려 노력해야 국가의 존재 의미가 있다. 위험과 불확실성의 진원지인 극심한 빈부 격차를 수수방관한다면 국가로서 기본책무를 외면하는 것이다. 오늘날 공급 과잉 사회에서 소비 수요의 기반이 되는 분배가 성장 못지않게 중요하다. 아무리 좋은 상품을 만들어도 소비 기반이 무너지면 아무 소용이 없다.

저출산·고령화·저성장 시대로 진입하면서 한국은 과거 고도 성장기와 질적으로 다른 사회가 됐다. 풍요롭고 안전하며 행복한 삶에 대한 국민의 욕구 수준은 더 높아졌다. 진정한 보수라면 이런 시대적·국민적 요구에 제대로 부응해야 한다. 뼛속까지 쇄신하고 구체적 대안을 제시해야 보수에게도 한가닥 희망이 생길 수 있다.

신세철 전 금감원 조사연구국장

◆ 알림=보수의 재탄생을 모색하기 위한 기획 시론 ‘보수의 길을 묻다’를 시리즈로 싣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