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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낡은 이념 틀 허물고 ‘신보수’의 새집 짓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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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보수의 길을 묻다 ⑥·끝 

류제화 여민합동법률사무소(세종시)대표변호사

류제화 여민합동법률사무소(세종시)대표변호사

6·13 지방선거에서 자유한국당이 참패한 뒤 통렬한 자기반성과 혁신이 이뤄질까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기대했다. 그런데 역시나 였다. 당내에서 파벌끼리 서로에게 손가락질하는 꼴사나운 내홍(內訌)이 한창이다. 이런 한국당을 보면서 일각에서는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보수 궤멸론’이 실현됐다”고 분석한다. 그러나 몰락한 건 보수가 아니라 한국당이다. 정확히 말하면 반공주의와 성장 신화에 기대어 편하게 정치를 해온 정치꾼들이 몰락한 것이다.

신보수 중심 가치는 개인의 자유 #개인과 사회의 공존도 모색해야 #집단·이념·폐쇄·분열·극단 탈피 #신보수 표방 새 정치세력 나와야

보수 유권자들은 자신들을 대변해 줄 새로운 보수 세력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다. 새로운 보수는 어떤 가치와 지향을 가져야 할까.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에서 “인간은 본성상 모형대로 찍어내고, 그것이 시키는 대로 따라 하는 기계가 아니다. 그보다는 생명을 불어 넣어주는 내면의 힘에 따라 온 사방으로 스스로 자라고 발전하려 하는 나무와 같은 존재다”라고 썼다. 인간에게 자유가 지니는 가치를 가장 아름답게 표현했다고 평가 받는 구절이다. 하지만 우리 역사에서 개인은 단 한 번도 무대 위에 오르지 못한 채 거대하고 숭고한 뭔가에 번번이 자리를 내줘야 했다.

이제 ‘신보수’, 즉 새로운 보수의 중심에는 ‘개인의 자유’가 있어야 한다. 지난 시절 보수는 국익이라는 이름 아래 개인에게 희생을 강요했다. 덕분에 우리는 국가 주도의 일사불란한 발전전략을 채택했고 눈부신 경제성장을 일궈냈다. 이제는 시대가 달라졌다. 국가와 민족보다 개인이 우선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지난 평창 겨울올림픽 때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단일팀 구성을 놓고 논란이 생겼다. 당시 청년들은 공정성보다 민족을 앞세울 수 없다며 거세게 반발했다. 새로운 시대의 주역인 청년들의 달라진 세계관의 일면이 드러났다. 공정성은 개인이 자유롭기 위한 최소한의 사회적 조건이다.

신보수는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면서도 개인과 사회의 공존을 모색한다. 인간은 사회를 이루고 살 수밖에 없으며 자신의 자유가 실질적으로 보장받기 위해서는 타인의 자유도 최대한 존중해야 한다는 점을 받아들인다. 자유시장 경제와 작은 정부를 옹호하지만, 사회적 약자의 권익 보호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믿는다. 외부에 맞서 공동체를 수호하는 데에는 섣부른 낙관과 온정주의보다 합리적 의심과 강한 힘이 필요하다.

시론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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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보수는 낡고 경직된 이념체계나 틀에 자신을 가두지 않고 실사구시(實事求是)적이고 실용적인 태도로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한다. 현대사회가 당면한 문제들은 어느 하나의 관점으로만 해법을 찾을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하지 않다. 필요하면 개인의 자유를 근본적으로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다른 관점도 얼마든지 수용하고 채택할 수 있어야 한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 국가 미래전략인 ‘비전 2030’을 만들었다. 당시 비정규직 대책의 하나로 노동 관련 법규를 고용·해고를 동시에 촉진하는 유연성·안정성 제고에 중점을 두어 개편할 것을 제안했다. 노동시장 유연성은 진보 진영에서는 금기시된 의제였지만 당시 노 정부는 낡고 경직된 이념의 틀에서 벗어나 문제 해결과 대안 제시에 방점을 찍고 과감하게 나섰다.

이런 사례처럼 신보수는 이념적으로는 합리적 자유주의, 방법적으로는 유연한 실용주의의 길을 가야 한다. 물론 그 여정은 매우 험난할 것이다. 한국의 기존 정치 지도자들은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개인보다는 집단, 실용보다는 이념, 개방보다는 폐쇄, 통합보다는 분열, 합의보다는 극단에 치우쳐 정치를 해왔다.

그들은 기득권이라는 공고한 벽을 내세워 새로운 정치 세력의 진입을 막을 것이다. 그러나 상식의 정치로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라는 것이 촛불 민심의 준엄한 명령이다. 개인주의·자유주의·합리주의, 그리고 상식에 기반을 둔 신보수의 등장은 역사의 필연이다.

이제 남은 건 실천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신보수의 가치와 지향을 내면화한 정치 세력을 형성해야 한다. 온라인에서든, 오프라인에서든 서로 모여 생각을 나누고 치열하게 토론해야 한다. 최근 이준석 바른미래당 노원병 지역위원장은 21명의 젊은 필진을 모아 정치에 대한 담론을 형성할 블로그를 만들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세대교체를 위한 신선한 사례다. 이런 시도들이 전국 곳곳에서 꾸준히 나오면 우리가 일찍이 찾아볼 수 없었던 새로운 유형의 정치인 인재 풀이 생기게 된다. 젊고 참신한 그들이 신보수의 원형이 될 것이다. 눈앞의 상황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할 필요는 없다. 보수의 새로운 미래를 향한 담대한 도전을 지금부터 시작해야 한다.

류제화 여민합동법률사무소(세종시) 대표변호사

◆알림=보수의 재탄생을 모색하기 위한 ‘보수의 길을 묻다’ 기획 시리즈에 시론 원고를 보내 주신 독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