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이 못내 못이룬 ‘나라다운 나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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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9호 32면

책 속으로

다산학 공부

다산학 공부

다산학 공부
다산연구소 엮음, 돌베개

‘목민심서’ 200년 맞아 돌아본 다산 #“지금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 망해” #학자·관료·시인 다양한 면모 조명

‘천재’나 ‘성인’이라는 수식어는 다산 정약용(1762~1836)과 굉장히 잘 어울린다. 그는 40~57세에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귀양살이를 떠나며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이제 나는 겨를을 얻었다. 하늘이 내게 학문을 연구할 기회를 주었다”며 기뻐했다. 500권이 넘는 책을 저술했다.

올해 『목민심서』(1818) 저술 200주년을 맞아 『다산학 공부』가 출간됐다. 임형택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목민심서』에 대해 “명나라·청나라의 목민 서류 중에서도 『목민심서』에 견줄 만큼 방대한 것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라고 평가한다.

『다산학 공부』는 내로라하는 연구자들이 쓴 일반인을 위한 ‘다산 입문서’지만, 유학·동양학에 대한 기초 지식이 있어야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책의 반은 다산의 사서육경(四書六經) 연구인 경학(經學), 나머지 반은 『경세유표(經世遺表)』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심서(欽欽新書)』가 대표하는 다산의 경세학(經世學)을 다룬다.

출간 배경에 대해 다산연구소 박석무 이사장은 이렇게 말한다. “부패를 막고 제도를 바꿔 나라다운 새로운 나라를 한번 만들어보자는 의미에서 우리는 다산 경세학의 기본 논리를 다시 검토하고 연구할 필요가 있다. 시대가 바뀌어 그대로 실현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다산을 원용하고 긍정적인 내용을 다시 구현하고 새로운 논리를 첨가할 수 있다. ‘한번 좋은 나라를 만들어 보자’는 다산의 생각과 저희의 생각이 맞아떨어졌다. 다산 공부를 다시 좀 해보자! 하는 논리가 나왔다.”

전남 강진의 다산초당. 정약용은 이곳에서 18년간 유배생활하며 집필에 몰두했다. [중앙포토]

전남 강진의 다산초당. 정약용은 이곳에서 18년간 유배생활하며 집필에 몰두했다. [중앙포토]

연구자 14명이 드러낸 조선 후기 최고의 학자 다산은 어떤 모습일까. 요약하면 이렇다.

다산은 중국 송나라 유학자 주희(朱熹, 1130~1200)와 다른 독자적·독창적 유교 경전해석을 했다. 그는 주자의 경학에서 긍정할 부분과 비판할 부분을 추려냈다. 김언종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는 “11세기 이래로 한·중·일 동양 삼국의 학자들 가운데 주희의 학설을 배격한 사람이 적지 않았지만, 다산만큼 충분히 수긍이 가는 반대 의견을 낸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평가한다.

다산 사상의 키워드 중 하나는 ‘혁신’이다. 그는 『맹자』를 재해석한 『맹자요의』(1814)에서 혁신적인 인간상을 제시했으며, 『경세유표』(1817)을 통해서는 국가 혁신의 방략을 제시했다. 또한 균형을 중시했다. 지방 수령의 지침서인 『목민심서』(1818)는 민(民)의 한계와 가능성을 냉혹한 균형 감각으로 진단했다.

시(詩) 2500여 편을 남긴 시인이기도 했다. 당시 사대부들은 다산처럼 학자·관료이자 시인이었다. 하지만 다수 사대부들의 시 세계는 학자·관료로서의 그들 삶과 따로따로였다. 다산의 경학과 경세학은 ‘둘이 아닌 즉 하나’(不二)였다. 마찬가지로 다산의 시 세계에서 그의 경학·경세학과 문학은 불이 관계였다. 그는 또 “나는야 조선 사람, 조선시 즐겨 쓰리”라고 읊은 ‘시원적 민족주의자’였다.

다산은 20세에 “우주의 모든 일을 다 드러내어 모두 정리하겠다”며 포부를 다짐한, 엄청난 자부심과 자기 확신, 초지일관의 정신으로 무장한 사상가이기도 했다. 요즘 말로는 ‘만물 이론(theory of everything)’을 추구했다.

‘예언자’ 같은 모습도 발견된다. 그는 "지금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는 반드시 망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불행히도 조선은 다산의 경고를 무시하고 국권을 상실했다. 어쩌면 다산은 같은 경고를 우리에게 할지도 모른다.

김환영 지식전문기자 whan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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