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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돈 공천 유권자가 심판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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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우려했던 것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5.31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당의 공천 장사가 연일 신문에 대서특필되고 있다. 지난해 나는 중앙일보 시론 '기초자치단체 정당공천 철회해야'(12월 28일자)에서 "기초지방의회 의원까지 정당공천제로 하는 법 개정이야말로 제17대 국회의 개혁성이 상실됐음을 선언한 최대의 개악 입법"이라고 비난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 우리의 정당 수준으로는 공천 장사가 불을 보듯 뻔했다. 사사건건 대립해 온 여야가 기초의원 정당공천제 도입에 쉽게 합의한 명분은 '책임 정치 구현'이었지만 실제는 '통제 밖'에 있는 기초의원과 단체장들을 국회의원들이 확실히 장악하겠다는 정략적 이해타산의 결과였다. 지역 할거 구도 속에서 '정당 공천=당선'의 등식이 성립하고, 지역구 의원이나 당원협의회장이 공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됐으니 공천 장사가 성행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법 개정 이후 기초지방의회 의원들까지 지역구 국회의원들에게 줄을 서느라 엄청난 고생을 했다. 국회의원들이 주장하는 기초의원들의 자질 향상, 여성 진출을 위한 비례대표제 도입, 유급화에 따른 중선거구제 도입 등은 그야말로 설득력 없는 부수적 구실에 불과했음이 확실히 입증됐다.

열린우리당은 광역.기초의원 비례대표 후보 신청자들에게 선거비용 명목으로 수천만원에서 최고 1억4500만원까지 특별당비를 요구하고 있다. 선거관리위원회 해석상 법적 문제가 없다고 하지만 돈을 낼 능력이 없으면 후보가 될 수 없다는 것도 납득하기 어렵거니와 당선 후 부패의 고리가 될 수 있다는 점도 우려된다.

둘째, 광역자치단체는 정당이 조직적.체계적으로 관리하더라도 주민 생활과 직결된 기초자치단체는 중앙 정치와는 무관하게 운영돼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 중론이었다. 그런데 정당공천제로 기초자치단체까지 중앙정치 판으로 만든 것은 개악이었다. 그것은 이번 지방선거에 나서는 각 당의 주된 전략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한나라당은 '노무현 정권 심판론'이고 열린우리당은 '부패한 지방권력 심판론'이다. 이렇게 되면 지방선거 결과가 지방자치단체와 의회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현직 대통령과 중앙정당들에 대한 평가로 결정된다. 지방의회가 구성된 뒤에는 주민을 위한 자치는 없고 정당 간의 싸움만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번 지방선거에선 지역주민들이 정신을 바짝 차려 중앙정당들을 견제하고, 진정으로 지역 발전에 헌신할 수 있는 대표로서 무소속 후보에게 많은 관심을 갖는 것이 현명하다. 일본의 경우가 좋은 예다. 오랜 지방자치의 역사 속에서 1990년대 이후 기초자치단체장은 거의 100%가 무소속이다. 광역자치단체장인 지사의 경우도 2000년 이후 95.7%라는 놀라운 통계를 갖고 있다. 중앙정치의 폐해를 깨달은 일본인들이 현명하게 선택한 결과다. 우리도 이제 지역주민이 중앙정치를 심판할 때가 되었다.

마침 이번 지방선거에선 유럽과 일본에서 성공한 매니페스토(참 공약 선택하기) 운동이 중앙선관위의 주도 아래 확산되고 있다. 그 일환으로 지난 20일 여야 합의로 광역.기초단체장 후보들이 선거운동 때 자신의 정책을 담은 선거공약서를 만들어 배포하는 것을 허용하는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제출했다. 이제 지역주민은 선거공약서와 인물을 꼼꼼이 살펴 지역 일꾼을 선택하는 선거혁명을 일궈내야 한다. 그래서 중앙정당의 공천 장사를 무색케 해야 한다.

이관희 경찰대 교수 전 한국헌법학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