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시간 단축 위반 6개월 처벌 유예…정부도 시간 벌었지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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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달부터 시행(300인 이상)되는 근로시간 단축 제도가 사실상 6개월간의 준비 기간을 가질 수 있게 됐다. 당정청이 20일 올해 말까지 계도기간을 두기로 전격 결정하면서다. 법에 명시된 시행시기는 지키면서 제도의 연착륙을 꾀하겠다는 뜻이다.

시행 10일 앞두고 당정청, 전격 결정 #경총의 6개월 계도기간 요청 수용 #"준비 돼있다"던 고용부와 다른 판단 #산업현장 혼란과 경제 충격 예방 #정부도 제대로 된 대책 마련할 시간 벌어 #기업의 신규 채용시기가 겨울인 점도 감안

이낙연 국무총리가 20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고위당·정·청 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낙연 국무총리가 20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고위당·정·청 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런 결정이 나온 근거는 명확하다. 무엇보다 경제에 미칠 부담이 걱정됐다.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에 따른 충격에서 빚어진 고용 참사에 근로시간 단축까지 겹치면 파장이 만만찮을 것으로 판단한 듯하다.

그렇다고 정부가 제도 시행에 따른 뚜렷한 대책을 내놓은 것도 아니다. 당정청으로선 계도기간 동안 산업현장의 실태를 꼼꼼하게 들여다보고 제대로 된 대비책을 마련할 시간을 벌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 변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 전날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정부에 건의한 정책제안이다. 경총은 6개월간의 계도기간을 요청했다.

김영주 고용노동부 장관이 "대부분 기업은 근로시간 단축 시행에 대비한 준비를 잘하고 있다"고 여러 차례 얘기한 점을 고려하면 이 제안이 사장되는 듯했다. 실제 일자리 주무부처인 고용부에선 이에 대한 논평 한 줄 내지 않았다.

그러나 20일 머리를 맞댄 청와대와 더불어민주당, 국무총리실의 생각은 달랐다. 산업현장의 혼란을 계속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그렇다고 뾰족한 대안도 없던 터에 경총이 뜻밖의 묘책을 낸 셈이다.

이낙연 국무총리가 이날 고위당정청협의회에서 "(경총의 건의는) 근로시간 단축 연착륙을 위한 충정의 제안으로 받아들이고 검토할 가치가 있다고 저는 봤다"고 비교적 강하게 얘기한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서울 시내의 한 사무실에서 야근하는 직장인들 [연합뉴스]

서울 시내의 한 사무실에서 야근하는 직장인들 [연합뉴스]

이로써 기업은 한숨 돌릴 수 있게 됐다. 법에 맞춰 근로시간 단축을 시행하면서 문제점을 발견하고, 그에 따른 해결책을 마련할 수 있는 시간을 얻었기 때문이다.

실제 당정청은 근로시간 단축 시행과 동시에 법을 엄격하게 집행하면 기업이 선의의 범죄자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를 했다.

근로시간 포함 여부를 두고 노사가 사사건건 갈등을 빚으면 그로 인한 눈에 보이지 않는 경제적 비용도 눈덩이처럼 커질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결국 경제에 먹구름을 덧씌우게 된다.

정부도 시간을 벌었다. 현재로선 산업현장에 적용할 가이드라인조차 제대로 없는 상태다. 주먹구구식 법 집행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각 지방 고용청의 근로감독관도 혼란스러워할 정도다.

더욱이 제도가 마련되면 다양한 방법으로 지킬 수 있게 길을 터주는 게 정부가 할 일이다. 한데 유연근무제와 같은 대책은 손도 못 대고 있다.

고용부는 "산업현장에 대한 실태조사를 한 뒤 개선책을 내놓을지 판단하겠다"고만 하고 있다. 정부도 그동안 준비가 거의 안 돼 있었다는 얘기다. 계도기간이 6개월간 주어지면서 정부는 이 기간에 유연근무제 등에 대한 제도를 정비할 시간을 얻은 셈이다.

심각한 고용 상황도 이번 결정에 큰 변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근로시간이 단축되면 신규 인력이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300인 이상 기업의 채용 시기는 대부분 대학의 졸업 시즌과 맞물린 겨울에 몰려 있다. 기업이 근로시간 단축에 따른 필요 인력을 산출할 수 있게 시간을 주기 위해서라도 채용 시기를 고려한 정책 계도기간이 필요했다.

김기찬 고용노동선임기자 wols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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