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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치락뒤치락 북·미 100일 레이스, 9회말 투아웃 승자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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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회담은 여러 측면에서 기록적이다. 최초의 북·미 정상회담이라는 점 말고도 단기간 내에 전격적으로 진행됐다는 점, 그 과정에서 예상치 못했던 여러 번의 판흔들기가 있었다는 점 등이 그렇다. 공교롭게도 12일은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문재인 대통령의 특사 자격으로 방북해 김 위원장의 정상회담 의사를 확인한 3월5일로부터 꼭 100일째 되는 날이다. 야구 경기로 치면 이제 9회말 투아웃의 상황. 지난 100일 간의 숨가쁜 북·미 레이스를 정리해봤다.

3월8일 트럼프 대통령에게 김정은의 정상회담 의사를 전달하는 정의용 실장. [연합뉴스]

3월8일 트럼프 대통령에게 김정은의 정상회담 의사를 전달하는 정의용 실장. [연합뉴스]

◇뜻밖의 게임 성사=정의용 실장은 3월8일(현지시간) 워싱턴을 방문해 트럼프 대통령에게 김 위원장이 만나기를 원한다고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뜸들이지 않고 “5월까지”라며 시기까지 못박아 바로 수락했다. 당시 허버트 맥마스터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반대했다고 한다. 미 대통령이 북한 지도자를 만나는 것 자체가 체제를 인정해주는 의미인데, 이런 보상을 그냥 줘버릴 수는 없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승부사 기질이 세기의 대결을 전격적으로 성사시켰다.

◇2회 말 미국의 빠른 선수교체=트럼프 대통령은 외교안보 라인부터 정비했다. 3월13일 선발투수를 렉스 틸러슨 미 국무장관 대신 마이크 폼페이오 장관으로 교체했다. 강속구로 정면 승부를 즐기는 정통파 스타일이다. 3월 22일에는 맥매스터 국가안보 보좌관 대신 존 볼턴 보좌관을 유격수로 내세웠다. 북한을 여러번 상대해본 볼턴 보좌관은 2, 3루 간을 빠져나가는 북한 타자들의 공을 잡아채 더블 플레이를 잡아내는 데 능하다. 북한 덕아웃에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삽화=김회룡기자aseo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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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회초 북한의 기습번트=김정은은 3월25~28일 중국을 방문하는 것으로 기습 번트를 날렸다. 북·중 관계 복원을 통해 중국이라는 후원자를 확보하려는 선제적 조치였다. 여기서 김정은의 ‘단계적·동시적 조치’라는 비핵화 접근법이 처음 확인됐다. 일괄타결을 원하는 트럼프 대통령과의 의견 차가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3월25일 방중해 시진핑 주석과 함께 중국군 의장대를 사열하는 김정은. [연합뉴스]

3월25일 방중해 시진핑 주석과 함께 중국군 의장대를 사열하는 김정은. [연합뉴스]

◇3회 말 미국의 히트앤드런=트럼프 대통령은 3월31일~4월1일 폼페이오 장관을 북한에 보냈다.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를 두고 여러 해석이 난무하자 자신의 복심을 보내 진의를 확인하려는 의도였다. 타자는 무조건 스윙, 주자는 무조건 전력질주. 트럼프 대통령은 경기 초반 득점을 통한 기선 제압을 원했다.

삽화=김회룡기자aseokim@joongang.co.kr

삽화=김회룡기자aseokim@joongang.co.kr

◇번외게임=북·미 간 신경전이 가열되는 가운데 판문점에서 번외게임이 열렸다. 문 대통령과 김정은의 4·27 남북 정상회담이다. 김정은은 판문점 선언에서 ‘완전한 비핵화’ 목표에 합의했다. 또 문 대통령 앞에서 “앞으로 자주 만나 미국과 신뢰가 쌓이고 종전과 불가침을 약속하면 왜 우리가 핵을 가지고 어렵게 살겠느냐”며 비핵화의 전제조건을 꺼내들었다.

◇4회말 미국의 선취득점=판문점 회담 뒤 5월7~8일 김정은의 2차 방중→5월9일 폼페이오 장관의 2차 방북→5월10일 북한의 미국인 억류자 3명 석방 등이 이뤄졌다. 특히 장기간 억류됐던 미국인들이 미국으로 돌아온 것은 트럼프 대통령의 깔끔한 선취득점이었다. 그러면서 리바아식 핵 포기 모델, 핵무기의 조기반출 등 구체적인 비핵화 플랜을 제시하며 대북 압박을 병행했다.

북한에 억류돼 있다가 석방된 한국계 미국인 3명이 5월10일 미국 워싱턴DC 앤드루스 공군기지를 통해 귀환하고 있다. [중앙포토]

북한에 억류돼 있다가 석방된 한국계 미국인 3명이 5월10일 미국 워싱턴DC 앤드루스 공군기지를 통해 귀환하고 있다. [중앙포토]

◇5회초 벤치 클리어링=그냥 당할 ‘김정은 감독’이 아니었다. 북한은 전통적인 벼랑끝 전술을 선보였다. 5월16일 한·미의 정례 연합훈련인 맥스선더를 이유로 남북 고위급회담을 일방적으로 취소했다. 같은 날 김계관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이 담화를 내고 ‘일방적 비핵화’를 거부했다. 5월24일에는 최선희 외무성 부상이 담화를 통해 마이크 펜스 부통령을 비난하며 정상회담을 재고할 수 있다고 위협했다.

삽화=김회룡기자aseokim@joongang.co.kr

삽화=김회룡기자aseokim@joongang.co.kr

◇5회말 노게임 위기=최선희가 담화를 낸 날,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통해 정상회담 취소를 통보했다. 북한의 담화에서 드러난 ‘엄청난 분노와 공공연한 적대감’이 이유였다. 북한이 판을 흔들려 하자 아예 판을 깨버리겠다는 경고를 하고 나선 것이다. 노게임 위기에 봉착했던 북·미 정상회담은 북한이 곧바로 김계관 담화를 통해 “조·미 수뇌상봉이 절실하다”고 한수 물러나면서 다시 국면 전환을 맞았고, 미국의 우위에서 게임이 재개됐다.

트럼프 대통령이 6월1일 김정은의 친서를 들고 온 김영철과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트럼프 대통령이 6월1일 김정은의 친서를 들고 온 김영철과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8회말 난타전, 북한의 구원투수 투입=이후 판문점에서는 의제 실무협의, 싱가포르에서는 의전협의가 동시에 진행됐다. 본격적인 난타전이 이어졌고 김정은은 불펜을 가동해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을 구원투수로 투입했다. 김영철은 워싱턴으로 가 트럼프 대통령에게 김정은의 친서를 전달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묘하게 입장을 바꾼 것은 이 때부터다. 일괄타결과 초단기간 내 비핵화를 주장했던 그가 갑자기 “정상회담은 과정의 시작”, “한 번 회담으로 모든 것이 될 수는 없다” 등을 말했다. 금과옥조처럼 반복했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CVID)를 강조하는 일도 뜸해졌다.

◇9회말 투아웃 동점에서 주자 3루=경기 막판 동점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끝내기 안타를 노린다. 김정은은 3루 주자의 홈인을 막기 위해 전진수비를 펼치며 미국을 압박하고 있다. 싱가포르 현지에서 흘러나오는 김정은의 12일 오후 2시(현지시간) 귀국설은 북한의 전략일 공산이 크다. 12일 오전 9시 시작될 예정인 북·미 정상회담을 5시간 안에 끝내겠다고 선을 그은 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은 모든 타자가 한 방이 있는 강팀이다. 폼페이오 장관은 회담을 하루 앞둔 11일 자신의 트위터에서 “우리는 한반도의 CVID 달성을 위해 전념하고 있다”며 다시 CVID를 꺼내들었다.

◇연장전? 혹은 2차전?=경기 결과는 12일 센토사 담판에서 판가름난다. 경우에 따라 회담이 13일로 연장될 수도 있다. 또 1차전은 무승부로 하고 머잖아 2차전이 열릴지도 모른다. 분명한 건 트럼프 대통령은 단기전 승부를 원하고 김정은은 최대한 장기전으로 끌고가려 할 것이란 점이다.
싱가포르=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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