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멈춤’의 기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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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6호 34면

김하나의 만다꼬

광고회사를 다니던 십수 년 전의 일이다. 회사가 나와 맞지 않는 것 같아 아무래도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하던 즈음이었다. 광고를 만들면 성우와 자주 일을 하게 되는데, 그날은 ‘특A급’으로 분류되는 중년 여성 성우를 처음 만나 인사를 드렸다. 명함을 건네며 “안녕하세요, 카피라이터 김하납니다”라고 했더니 그분이 나를 빤히 보더니 대뜸 이런 말을 건넸다. “목소리가 참 좋으시네. 성우를 한번 해봐요. 카피라이터도 좋은 직업이지만, 성우도 참 좋은 직업이에요.”

일단 칭찬이니 기분이 좋았고, 유명한 성우이니 만나는 사람도 무척 많을 텐데 이런 말을 자주 건네지는 않으리라 싶어서 한동안 마음에 남았다. 그것도 이미 번듯한 직업이 있는 사람에게 말이다. 안 그래도 그 무렵 나는 성우라는 직업이 꽤 매력적이라고 느끼고 있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회사를 그만둔 뒤 나는 ‘해보기나 하자’는 마음으로 성우 수업을 들었다. 신체 단련과 발성 연습, 연기 연습, 내레이션 연습 등을 했는데 배우고 훈련하면 할수록 재미가 있었다. 1년 정도 꽤 몰입해서 했다. 방송사 성우 공채 시험도 봤는데 보기 좋게 떨어졌다. 그래도 열심히 했고 내가 발전하는 게 느껴졌기 때문에 후회는 안 했다.

성우 공부를 하면서 배운 것들 가운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포즈’ 즉 ‘잠깐 멈춤’의 중요성이었다. 말의 매력과 집중도를 높이는 것은 이 ‘잠깐 멈춤’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이후 다시 돌아가 카피라이터로 일하면서 나는 회의를 할 때나 발표를 할 때 목소리에 집중시키는 힘이 있다거나 말을 잘한다는 얘기를 곧잘 들었다.

성우가 될 수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했던 것처럼 나는 내가 작가가 될 줄도 몰랐다. 쓰지 않고는 못 배길 이야기가 생겨서 첫 책을 썼는데 고맙게도 두 번째, 세 번째 책을 낼 기회가 왔다. 여기저기서 북토크나 강연 같은 것도 하게 되었다. 처음엔 긴장되고 어색했지만 여러 번 하니까 요령도 생겼다. 북토크를 들은 분의 추천으로 TV 프로그램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세바시’에 나가게 되었고 네이버 생방송을 진행하기도 했다. 꼬리를 문 연쇄반응이 일어나 지금은 예스24와 비씨카드가 공동 제작하는 팟캐스트 ‘책읽아웃-김하나의 측면돌파’의 진행자가 되었고 MBC라디오 ‘세상을 여는 아침’에 고정 출연하고 있다. 메일함에는 원고 청탁보다 출연 섭외가 더 많이 온다. 성우가 되지는 못했지만 ‘말하는 사람’이라는 직업도 갖게 된 셈이다. 요즘은 어딜 가나 “잘 듣고 있어요”라는 인사를 듣는다.

팟캐스트를 처음 맡으면서 나는 두 가지 목표를 세웠다. ‘정확하고 아름답고 재치 있는 우리말을 쓸 것’과 ‘양질의 대화를 추구할 것’. 도서 팟캐스트지만 책을 많이 소개하는 것도, 청취율을 높이는 것도 내가 바라는 목표는 아니다. 나는 제대로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라디오 PD님이 “작가님 목소리는 파장 그래프 위쪽이 편평하게 깎여 있어서 안정감 있고 좋은 소리예요”라고 하셨을 때 내심 무척 기뻤다. 어느 분이 팟캐스트를 듣고 ‘차분하고 다정한 모국어’라고 쓰셨을 때도 크게 감동했다.

뜬금없이 성우 공부를 했던 1년은 내 직업 인생에서 ‘잠깐 멈춤’이었을지도 모른다. 남들이 보기엔 곁길로 샌 것 같았겠지만 내겐 무척 중요한 1년이었다. 처음 만난 내게 대뜸 성우가 되어 보라고 권했던 옛날의 그분께 문득 고마운 마음이 든다. ●

브랜드라이터. 예스24 팟캐스트 ‘책읽아웃’ 진행자.『 힘 빼기의 기술』을 쓴 뒤 수필가로도 불린다. 고양이 넷, 사람 하나와 함께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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