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국민연금 악용하면 ‘연금 사회주의’로 변질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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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국민연금이 대한항공 지분 12.45%를 보유한 2대 주주 자격으로 적극적 주주권 행사에 나섰다. 국민연금 최고 의결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는 대한항공 총수 일가의 일탈행위와 관련해 공개적 우려 표명과 공개서한 발송, 경영진 면담 추진을 결정했다. 지금까지 의결권 찬반 표시나 배당 확대 요구 같은 제한적 주주권 행사에 그쳤던 것과는 대조되는 행보다. 기금운용위원장인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국민 자산을 지키고 국민연금 수익성을 고려해야 한다”며 적극적 주주권 행사를 제안했다.

갑질, 밀수 및 관세 포탈, 재산 도피 의혹 등에 휘말린 대한항공 총수 일가의 위법이 확인되면 당연히 응당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 이들에 대한 여론이 악화하며 기업 가치가 위협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연금의 거시적 운영 방향을 결정하는 복지부 장관과 기금운용위원회가 개별 기업 사안에 직접 나선 것은 전례도 없고 적절치도 않다. 여론에 힘입어 국민연금을 기업 손보기 수단으로 삼는다는 의구심을 피할 수 없다. 개별 기업 문제로 국민연금 손실이 우려된다면 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 산하 의결권전문위원회나 투자위원회에서 전문적으로 다루면 될 일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 공약으로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을 내걸었다. 그러나 국민연금이 재벌 길들이기 같은 정책 실현의 도구로 악용될 것이라는 우려도 만만찮다. 선진국들의 연금 지배구조와 비교하면 우리 국민연금공단과 기금운용본부의 지배구조 독립은 아직도 요원하다. 국민연금은 5% 이상 지분을 보유한 국내 기업만 276개에 달하는 거대 투자가다. 최근 현대차그룹이 국민연금의 지지를 확신할 수 없어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합병 계획을 세웠다가 철회한 데서 볼 수 있듯 영향력이 막대하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연금의 독립성이 보장되지 않는 한 ‘연금 사회주의’ 논란은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