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대표하는 게임사 넥슨의 창업자이자 넥슨의 지주회사인 NXC를 이끄는 김정주 대표가 1000억원 규모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자녀들에게 경영권을 넘기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1990년대 창업한 정보기술(IT) 벤처 1세대 중 경영권 승계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밝힌 것은 김 대표가 처음이다.
‘진경준 주식’ 무죄 확정 열흘 뒤 #“1심서 한 약속대로 사회 빚 갚을 것” #어린이병원·청년벤처 지원 확대 #“창업때부터 경영 승계 않겠다 생각”
김 대표는 29일 주요 언론사에 이런 내용을 담은 입장문을 e메일로 보냈다. 그는 e메일에서 “저와 제 가족이 가진 재산 일부를 사회에 환원하고, 새로운 미래에 기여하기 위한 작업을 시작하겠다”고 밝혔다. 앞서 김 대표는 고교 동창인 진경준 전 검사장에게 넥슨 비상장 주식 4억2500만원어치를 공짜로 준 혐의에 대해 지난 19일 서울고법 파기환송심에서 무죄 확정판결을 받았다. 김 대표는 “저는 1심 법정에서 ‘재판 결과에 상관없이 앞으로 사회에 진 빚을 조금이나마 되갚는 삶을 살아가겠다’고 약속드렸다”며 “재판을 받는 중 회사가 자산총액 5조원을 넘어서는 준대기업으로 지정됐다는 소식을 들었고, 우리 사회의 배려 속에서 함께 성장해 왔다는 점을 잘 인식하고 있다”고 이날 발표의 배경을 설명했다.
김 대표가 약속한 것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서울에만 있는 어린이재활병원의 확대다. 넥슨은 2016년 서울 상암동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 건립을 지원한 데 이어 올해 2월 ‘제2 어린이재활병원’을 세우기 위해 계열사들과 함께 사회공헌 활동을 위한 넥슨 재단을 설립했다. 김 대표는 “지난 경험으로 볼 때 이와 같은 활동을 위해 1000억원 이상이 필요할 것으로 보이지만 차질 없이 진행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자녀들에게 회사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고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겠다는 게 또 다른 약속이다. 김 대표는 유정현 NXC 감사와의 사이에 미성년자인 두 딸을 두고 있다. 그는 “이는 회사를 세웠을 때부터 한 번도 흔들림 없었던 생각이었습니다만 공개적인 약속이 성실한 실행을 이끈다는 다짐으로 약속드린다”고 강조했다. 김 대표는 “국내외 5000여 구성원과 함께하는 기업 대표로서 더욱 큰 사회적 책무를 느낀다”며 “투명하고 수평적인 문화가 유지돼야 회사가 계속 혁신하고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이 밖에도 “청년들의 벤처창업 투자 지원 등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일들로 기부를 확대해 나가겠다”고도 했다.
이날 입장문은 임원진과 상의 없이 전격적으로 이뤄진 것이다. 이재교 NXC 브랜드홍보본부장은 “2년 전 1심 재판 때 법정에서 했던 약속을 어떻게 실천할지 오래 고민한 끝에 김 회장이 애정을 갖고 추진해 왔던 어린이재활병원과 청년 창업가 지원을 사회 환원의 출발점으로 잡은 것 같다”며 “전문 경영인에게 회사를 맡긴다는 얘기는 오래전부터 주변에 이미 밝혀왔던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김 대표의 이런 결정은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켰던 ‘진경준 사건’의 영향이 크다. 창업주가 재판을 받는 동안 넥슨 이미지는 손상됐고 내부 직원들은 동요했다. 이 와중에 넷마블·엔씨소프트 등 경쟁사들이 치고 올라왔다. 하지만 최근 무죄 판결로 이런 악재가 어느 정도 정리되면서 회사 내·외부에 새로운 시작을 알린 것으로 풀이된다.
그와 친분이 두터운 지인들은 김 대표의 이런 행보가 새삼스러운 게 아니라고 전했다. 지주회사로 전환한 2006년 일찌감치 스스로 넥슨의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고 컴퓨터 박물관, 정보 격차 해소 사업 등 이미 다양한 사회 환원 활동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조직 내 열정과 혁신을 불어넣기 위해 입장문을 대외적으로 공개했다는 것이 업계의 분석이다.
한편 김 대표는 구체적인 기부 규모와 방식, 운영 주체와 활동 계획을 조만간 밝힐 예정이다.
손해용·박수련 기자 sohn.yo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