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의 교훈과 통일논의-임헌영 <문학평론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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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다시 8·15가 다가선다. 맞이하는 자세에 따라 종(패)전·광복·독립·해방·분단 등 저마다 그 의미가 다를 수밖에 없는 8월이다. 친일파였거나 그와 비슷한 삶을 누렸던 사람들에게는 패전이요, 왕정복고의 영광을 그리던 입장에서는 광복이며, 오로지 나라 찾기에만 바빴던 자세에서 본다면 독립이고, 모든 속박으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만들자는 싸움에 나섰던 사람들에게는 해방의 계기가 될 수도 있었던 8월이었다. 그러나 어느새 우리의 8월은 다른 어떤 뜻보다도 분단의 분수령으로 민족사의 앞길을 가로막는다.
분단 44년의 8월-.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들과 거리, 바다와 기업도/모두다 바쳐 새나라 세워 가리라-/한낱 벌거숭이로 돌아가 이 나라 주춧돌 고이는/다만 조약돌이고자 원하던/오오 우리들의 8월로 돌아가자. //명예도 지위도 호사스런 살림도 다 버리고/구름같이 휘날리는 조국의 깃발아래/다만 헐벗고 정성스런 종이고자 맹서하던/오오 우리들의 8월로 돌아가자. //어찌 닭 울기 전 세 번뿐이랴, 다섯 번 일곱 번 그를 모른다 하던 욕된 그 날이 아파/땅에 쓰러져 얼굴 부비며 끓는 눈물/눈뿌리 태우던 우리들의 8월-//먼 나라와 옥중과 총·칼 사이를 뚫고 헤치며 피 흘린 열렬한 이들 맞아/한갓 겸손한 심부름꾼이고자 빌던/오오 우리들의 8월로 돌아가자』(김기림『우리들의 8월로 돌아가자』에서).
이렇게 빌던 그 8월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냉전체제가 빚어낸 분단의 형해 만이 뒹군다.
그 8월의 교훈을 매장시켜버린 지금은 마치 바로 1945년 그 해의 8월을 다시 떠올리기라도 하듯이 똑같은 민족사적 쟁점들을 제기한다. 그것은 지나간 역사에 대하여 청산하기를 주저하는 일이나 통일론을 내걸고 도리어 분단을 합리화시킬 발판을 마련하는 것 등등에서 너무나 비슷한 역사의 반복을 느끼게 만든다. 그때나 지금이나 중요과제는 과거의 청산과 통일론으로 집약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8·15후 일제잔재를 청산 못한 실책은 분단 민족사의 영원한 상처로 남는다. 따라서 그 후 어떤 정권도 이점 때문에 민족사적 정통성의 시비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지난날을 계승해서 영광스러운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경우와 도리어 그 욕됨 때문에 모든 업적이 도로화 해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8·15직후의 친일정권이나 제6공화국의 친 제5공화국 정책은 다 후자에 속한다. 제6공화국이 지닌 유리한 조건들이 공연히 과거와의 관계 때문에 물거품이 안되기 위해서는 전두환 정권과의 단절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전직 대통령들의 처우일 것 같다.
이미 성역이 없다는 선언으로 알 수 있듯이 개방시대에서 전직의 고하가 잘잘못을 따지는 장애일 수는 없을 것이나 구태여 말한다면 절대 군주시대에도 폭정으로 낙인찍힌 왕은 후세에 「군」으로 불려졌을 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처우 또한 달랐다는 점을 참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더 심한 경우도 있다. 탕왕이 걸을 쫓고, 무왕이 주를 정벌한 사실은 신하로서 그 임금을 해친 용서할 수 없는 일이 아니냐는 제나라 선왕의 물음에 맹자는 이렇게 명쾌하게 답한다. 「인도를 해치는 자를 적이라 하고, 의리를 해치는 자를 잔이라 한다. 잔적을 일삼는 자는 일컬어 일부라고 한다」고.
존경받는 국가원수로 기록될 것이냐 아니냐를 판가름하는 것은 역사가 심판할 일이지 한 정권이 좌우할 일이 아닐 것이다. 어느 인디언 부족들은 자기종족을 한 사람이라도 죽이게 되면 추장이 될 수 없다는 불문율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8·15 이후, 우리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외치면서도 정작 인디언의 종족본능보다 뒤떨어진 민족의식으로 분단을 고착화시켜 버리지 않았나 반성할 계기가 온 것 같다.
그래서인지 이번 8월은 분단이후 통일에 대한 불기운이 가장 뜨겁게 타오르고 있다.
그 중 주목해야할 부분은 역시 학생들의 주장인 것 같다.
긴 단절과 이질감으로 접촉이 어려운 남북관계는 다른 국가와의 외교와는 달리 가장 순수한 세력들이 먼저 길트기 작업을 하는 방법이 좋다는 점에서도 이번 학생회담 의도는 순수하게 봐주는 게 좋을 것 같다.
이미 체제에 편입된 많은 계층이나 직업의 사람들은 어차피 기존의 자기계급이 지닌 기득권 때문에 근본적으로 이질성만 노출시키게 될 것인데 비하여 학생들은 이점에서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8월은 원컨대 형식적인 기념식이나 마치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8·15의 역사적 교훈을 살려 오늘의 우리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열쇠를 얻을 수 있었으면 싶다.
그 교훈이란 물어야할 과거와의 단절은 빠를수록 좋다는 것과 7·7선언에 바탕한 통일론의 국민주체적 추진이다. 이미 능동적으로 8·15를 맞지 못한 우리의 지난날의 고난이 가르쳐 주듯이 앞으로 닥칠 통일 역시 마찬가지다. 특정계층의 일방적 통일론이나 외세에 의한 통일은 또다시 우리를 역사의 주인자리에서 밀려나게 하는 계기만 될 것이다.
민족사의 주인은 정부만이 아니듯이 학생만도 아닌 국민모두의 것이며, 이런 국민의 뜻을 모아 주체적으로 이룩하는 통일이라야 그 후에 국민이 주인 되는 통일세상이 될 것이다. 만약 국민과 정부가 다른 뜻을 가졌다면 당연히 정부가 국민의 뜻을 따라야 할 것이다.
이런 뜻에서 우리는 8월의 의미를 다시 새기면서 역사의 원점으로 되돌려 오늘을 풀어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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