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국회사무처에도 "불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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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숙정의 불똥은 국회사무처 간부와 전문위원들에게로 튀었다. 국회에 대한 숙정은 공화당 장기집권과정에서 실력자들과의 연분으로 들어온 사람들을 솎아 내 구정권의 뿌리를 잘라 내는데 있었다. 그래야만「새 시대」「새 정권」의 그림을 백지 위에 그릴 수 있다는 것이 신 군부의 생각이었다.
『이권개입·축재 등의 비위관련 여부가 도외시된 것은 아닙니다만 국회 공무원들에 대해서는 임용과정이 가장 중요한 기준이었습니다. 때문에 물러난 사람들은 대개가 구 공화당 당원이거나 그들에 의해 추천된 사람들이었지요. 당원이 아니더라도 공화당과 밀착된 듯한 인상을 준 사람들이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공화당 세상에 공화당과 척 지고 살아갈 수 있는 국회 공무원이 몇 명이나 되었겠습니까. 시대가 바뀌었으니 물러난 것이지요. 국회 공무원은 그래도 정치의 뒤안길이라도 구경해 행정부처럼 자리에 연연해 울고 다니지는 않았습니다.』물러난 모국장의 증언.
그러나 숙 정된 사람들의 대부분이 당시 신 군부가 구사한 방법에는 유감을 표시한다.
『특채된 사람들의 인사카드에는 대개 추천인 등 이 연필로 부기 돼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설사 그런 기록이 없더라도 어떤 사람이 어떤 자리에 어떻게 앉게 되었는지 내부에서는 다 알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문체는 내부사정을 알아내는 방법이 상당히 치사했습니다.』
숙 정에 참여했던 Y씨도 국보위 및 보안사 관계자들의 현장방문 확인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군 관계인사들이 중심이 돼 일하다 보니 자연 국방대학원 동기생이나 군 출신공무원, 즉 사관학교출신 특채사무관들의 의견을 구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안면이 있는 사람들을 은밀히 만나야 속사정을 알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러다 보니 신 군부와 연줄이 있는 사람은 자연히 주목을 받고 웃사람들조차 이들의 눈치를 보거나 경계하는 풍조가 생겼습니다. 당장「유신사무관」이란 비아냥이 거세 지더니 다른 공무원들과의 괴리가 생기더군요.』
Y씨는 그렇다고 해서 사관학교출신 특채 사무관들이 일부러 소속 부서의 문제점을 국보위 측에 제보한 것은 아니며 오히려 신 군부가 그들을 찾아가 의견을 구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검찰의 문제점을 파악하기 위해 인연이 닿는 서울지검 P 지청 장과 L부장검사 등을 접촉했으나 일체 협조하지 않더라고 회고하면서『숙정 과정을 통해 공직자사회의 문제점이 많이 시정되긴 했지만 보이지 않는 불신이 조성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국회에서는 김종인(경과위), 심윤택(특별위), 고재봉(보사위), 김용석(건설위), 유용규(운영위), 권영민(운영위)씨 등 전문위원 (1급)6명과 정동우 관리국장(1급), 주문옥 연수원장(1급), 박종일 섭외국장(2급)등 11명이 물러났다.
국회사무처 총무 격인 관리국장이 물러나고 무풍지대로 알려진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관리국장까지 포함된 것을 보면 살림꾼은 일단 의심을 받고 쫓겨날 확률이 높았던 것 같다.
중앙선관위에서는 43명이 숙정 됐는데 대부분 무사안일이 이유였다. 다만 임기 직인 각 시-도 상임위원(1급)은 제외됐다.
이 같은 우여곡절 끝에 추진된 고위공직자 숙정은 작업시작 25일 여 만인 6월30일 마무리되어 본인에게 통보되기 시작했다. 자신의 숙정 사실을 뒤늦게 안 당사자들의 마지막 몸부림이 발표일인 7월9일까지 며칠간 계속됐지만 모두가 허사였다.
『숙정자 리스트는 6월말 정화분과위 전체회의 의결을 거쳐 원안대로 전두환 상임위원장의 결재를 받았습니다. 그 뒤 국보위의장인 최규하 대통령의 최종 재가 과정에서 단 한 사람, 손수익 내무차관이 극적으로 구제됐습니다만…. 대통령의 사인이 난 서류는 즉시 각부장관에게 통보됐고, 각 장관들이 본인에게 알리도록 했습니다. 장관 자신이 포함된 상공부는 장관에게 일단 상황을 설명해 주고 차관에게 명단을 보냈습니다』L씨의 회고.
『7월1일 국보위에서 내일(2일) 오후 3시에 명단을 넘겨줄 테니 장관들을 대기시켜 달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당시 중앙청 분위기는 말 안 해도 짐작이 갈 겁니다. 2일 오후 5시쯤 명단을 받아 각 장관들에게 전달했습니다. 그런데 실무국장으로 명단을 받아 온 저 자신이 포함된 거예요. 아연할 뿐이었죠. 설마 했지만 그건 사실이었습니다. 김용휴 총무처장관이 우리 총무처에 무슨 비위가 있느냐. 우리 국장들은 내가 책임질 테니 걱정 말라고 장담 해와 신경조차 안 썼습니다.
다 끝났다 싶더군요. 정재석 상공장관은 장관이야 언제나 그만 두게 할 수 있는데 왜 굳이 숙정이라는 이름을 붙여 자르느냐고 항변했다고 하더군요. 차관보급 이상은 어차피 신분보장이 안되므로 언제나 그만두라면 그만인데 왜 굳이 숙정이라고 했는지 모르겠습니다.』송영언 당시 총무처인사국장의 증언이다. 『이렇게 숙정자 명단을 넘겨받은 장관들은 차마 본인들에게 말을 못하고 있다가 4일에야 얘기하기 시작했답니다.
장관이 직접 숙정 대상을 고른 것은 아니었지만 통보하기가 무척 힘들었을 겁니다.
「안됐다, 한번 달리 뛰어 보라」고 말하는 정도가 고작이었지요.「내가 무슨 잘못을 했느냐, 이유라도 가르쳐 달라」는 당사자의 항변에 장관들도 모른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지요.』
『이건 초상집에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잇달아 하위 직 공무원의 숙정이 예고되어 있어 모두 숨죽이고 동료의 불운·불행을 지켜볼 뿐이었습니다. 설마 하고 자위하다가 당한 사람들 상당수가 경황 중에도 살길을 국보위위원·군장성들을 찾아다니며 호소했지만 대답은「진작 알았으면…」하는「위로」가 고작이었습니다.』
C부처 O차관보의 체험담을 좀더 소상히 들어본다.
『7월1일 공무로 해외출장을 떠났습니다. 출국 전 알 만한 사람을 통해 탐문해 보니 명단에 없다고 해요. 안심하고 나갔습니다. 10여 년간 공직에 있었지만 축재 등과는 무관해 숙정은 남의 일로 생각했습니다.
숙정 작업이 한창이던 때 약점이 있는 사람들이 보안사 요원들에게 잘 보이려 애쓰는 것을 보고 내심 비웃기도 했지요. 그러나 귀국 직전 일본에 도착하니 공관직원이 이상한 얘기가 들린다고 귀띔하더군요. 서울에 알아보니 나도 포함됐다는 겁니다.
8일 귀국하니 4일전 통보 받은 동료들은 이미 보따리를 싸 떠났더군요. 장관을 만났더니 출장 안 가고 있었으면 별일 없었을 텐데…라며 위로하더군요. 이유나 알아야 할 것 아니냐고 했으나 나도 모른다고 해요. 그 즉시 고시 동기생인 총무처차관에게 달려가 물어 보았지만 그 역시 모른다고 해요. 그래 억울한 사람에게는 소청 등 구제절차를 밟도록 해줘야지 후일 피해자들이 부당하다고 나서면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고 따졌습니다.
이 얘기가 총무처장관을 통해 국보위에 전달됐는지 16일쯤인가 같이 일하던 차관보로부터 점심을 같이하자고 연락이 왔어요. 나갔더니 소청신청을 했느냐고 물어요. 크게 잘못한 게 없는데 부당하다고 얘기하니까 앞으로 자리도 마련해 줄텐데 공연히 앞장서서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은 본인에게 안 좋다고 충고합디다.
그와 만나기 전인 12일쯤 신임장관을 찾아가 하루 아침에 이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따졌는데 밤 11시쯤 전화를 걸어와 개인적으로는 충분히 이해한다면서 전두환 상임위원장에게 내 얘기를 했었다며 내용을 알려주더군요. 장관이 성실한 사람인데 억울하게 됐다고 하니까 그런 사람 있으면 당장 구제해 써야 한다고 하더래요. 그러면서 장관은 진정서(소원서)를 써서 내일 가져오라고 합디다.
밤새 경위·공적 등과 함께 소원 서를 써 이튿날 새벽 장관 집을 찾아가니 훑어보고는 됐다며 내가 있던 자리는 다른 사람으로 메우기로 했으니 다른 자리를 알아보겠다고 해요.
이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는가 싶었지요. 그런데 그것은 착각이었습니다.
2∼3일 지나도 소식이 없더니 장관 친구인 한 국회의원이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장관이 직접 얘기하기 곤란하니 부탁한 모양 이예요.
장관이 크게 걱정하더라, 진정서를 올리려 했는데 그런 것을 들고 다니거나 전위원장에게 전달하기에는 너무 공포분위기라서 전달하기가 어렵다. 더욱이 실세인 실무자들이 무슨 소리냐, 그런 식으로 한두 사람 빼 주면 어떻게 하느냐고 반발해 어렵다고 전해 주는 거예요. 그 뒤 법치국가에서 혁명도 아닌데 이럴 수 있느냐, 억울한 사정을 접수조차 안 받는 것은 부당하다고 항변하고 다니자 그러면 나중에 국영기업체에도 못 나간다, 앞장서면 곤란하다는 충고가 도처에서 오더군요. 하는 수 없이 외국대학 객원교수로 나가기로 했는데 이번엔 여권을 안 내주는 거예요. 이유를 묻자 규정상 하자는 없으나 관계기관에 조회해도 회보가 안 온다는 겁니다. 외국에 나가 비판세력이 될 것 같아 그런 다는 얘기는 다른데서 들었고요.
결국 1년 뒤 여권이 나왔지만 그간의 눈물겨운 생활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특히 가족들 보기가 민망스럽고 동료 직원들 보기가 안쓰러워 고통스러웠습니다.』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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