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낭만주먹 낭만인생 23. 부산 피란지 돈벌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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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1990년대 중반 중국 칭다오에서 월급쟁이 사장을 할 때의 필자(일어서서 박수를 치고 있는 이). 옆은 공산당 간부들이다

신출귀몰했던 방천왕둥이 할아버지의 DNA 얘기를 꺼낸 것은 사실 한몫 쥐는 데 성공했던 10대 시절 나의 장사 수완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이 났던 해 중3이었으니 코흘리개를 갓 면했을 때다. 그런데도 1.4 후퇴 직후에 스스로 놀랄 만큼의 장삿속으로 떼돈을 거머쥐었다.

사정은 이렇다. 적 치하 3개월을 서울에서 지낸 우리 가족은 1.4 후퇴 때 피란을 떠났다. 영등포역에서 화물칸을 타고 끝없는 남행길을 재촉했고, 그때 "지옥이 이만 할까"하는 생각도 했다. 당시 나는 부모님과 5남매, 고모네 식구 네 명을 이끄는 인솔자였다.

품 안에서 얼어 죽은 갓난애를 내던질 수밖에 없었던 어느 어머니의 참담한 모습도 목격했지만, 그렇게 도착한 부산에서 도쿄 유학파인 아버지는 무능했다. 책상물림이기 때문이다. 대신 식구들이 생업전선에 나서야 했다. 경남 통영을 잠시 거쳤다가 전라도 순천으로 이사했다.

전쟁 전의 평온함이 살아 있던 그곳에서 돈벌이 궁리를 하게 됐다. 부산에서 사온 뻥튀기 기계로 장바닥에 앉아 뻥튀기 장수를 시작했다. 인기 만점이었다. 콩.강냉이.보리쌀 따위와 떡국 떡을 튀겨 팔았는데 푼돈을 쥐기 시작했다. 좌판은 순천지원 앞 삼거리 조흥은행 앞에 깔았다.

간혹 순천 인근을 돌며 도매로 떼온 물건들을 식구들에 맡겨 팔게 하면서 더 큰 돈벌이를 생각하게 됐다. 순천에서 잡은 돼지고기를 부산에서 팔자는 깜짝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부패를 막는 운송 방법이 과제였다. 그때 내 머리가 왜 그렇게 핑핑 돌았는지 우선 상이용사 한 분을 동업자로 끌어들였다.

수완 좋게도 그와 의형제를 맺기까지 했는데, 장사 방식은 이랬다. 갓 잡은 돼지 생고기의 부패를 막기 위해 내장부터 몽땅 들어냈다. 그 자리에 참숯을 채워넣은 뒤 봉합했다. 관에다 돼지를 통째로 넣은 뒤 다시 숯으로 돼지고기를 감쌌다. 내가 뭘 알았겠나. "여름날씨에도 1주일은 거뜬하다"는 촌로들의 귀띔에 따른 것이다.

관건은 운송. 그건 식은 죽 먹기였다. 관 위에 덮은 대형 태극기 한 장으로 말끔히 해결했다. 보라. 영락없는 전몰군인의 운송행렬이다. 세상에 없는'돼지 관'을 맞들면, 갈아타야 하는 기차며 뱃삯은 완전 무료다.

헌병들은 우리 일행에 깍듯한 경례까지 붙였다. 어떤 간 큰 헌병이 관을 들여다보자 할 것인가. 부산에 도착하면 우리는 너무도 바빴다. 선도 좋은 삶은 고기는 없어서 못 팔았다. 돌아올 때는 전대(돈주머니)가 불룩했다. 그걸로 부산에서 생필품을 사들여 전라도에서 다시 팔았다. 움직일 때마다 돈이 쌓였다.

어쨌거나 할아버지의 개성상인 DNA는 핏줄이었나 보다. 서울이 안정됐다는 소식을 듣기까지 2년 가까이 모든 돈이 200만환. 지금으로 치면 아파트 몇 채쯤일까? 그러나 나는 역시 미련퉁이었다. 다음 회에 밝히겠지만, 여자 몇 명에 빠져 그걸 홀랑 까먹었으니….

배추 방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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