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주운전 했는데 왜 무죄? 다리 사이 내비게이션이 발단

중앙일보

입력

음주운전 한 30대 무죄 선고받은 이유 

대리기사가 A씨 차량을 처음 세운 곳. 편도 2차선 도로로 갓길이 없다. [사진 울산지방법원]

대리기사가 A씨 차량을 처음 세운 곳. 편도 2차선 도로로 갓길이 없다. [사진 울산지방법원]

교통사고 위험을 피하려 음주운전을 한 것은 긴급피난에 해당해 무죄라는 판결이 나왔다.

대리기사 다리 사이 내비게이션 끼우고 운전 #실랑이 하다 “내리라” 하자 도로에 세우고 가 #울산지법 “교통사고 피하기 위한 긴급피난”

울산지법은 음주 상태로 대리기사가 두고 간 본인 소유 차량을 300m 정도 운전한 A씨(34)에게 지난 10일 무죄를 선고했다고 13일 밝혔다.

사건 전말은 이랬다. A씨는 지난해 7월 24일 저녁 지인들과 술을 마신 뒤 자정 무렵 대리기사를 불렀다. 기사가 길을 잘 몰라 다리 사이에 내비게이션을 끼우고 운전하자 A씨가 “길을 잘 모르느냐” “운전을 몇 년 했느냐”는 식으로 얘기하다 시비가 붙었다.

A씨가 기사에게 차에서 내리라고 하자 기사는 갓길이 없는 편도 2차선 도로에 차를 세우고 자리를 떠났다. A씨는 대리운전 업체에 기사를 다시 보내달라고 했지만 업체는 할 수 없다고 답했다. 이 도로는 차가 정차해 있을 거라 예상하기 어려운 곳이다. 차량 블랙박스 영상을 보면 다른 차들이 경적을 울리며 빠른 속도로 A씨 차량 옆을 지나갔다.

결국 A씨는 울산 북구 아산로 KCC 앞 도로에서 300m 떨어진 주유소 앞까지 차를 몰았다. 당시 A씨의 혈중알코올농도는 0.140%였다. 그리고선 새벽 12시 46분쯤 “위험할 것 같아 주유소에 들어왔다”며 112에 신고했다.

울산지방법원. [연합뉴스TV 캡쳐]

울산지방법원. [연합뉴스TV 캡쳐]

재판부는 대리기사가 차량을 세운 도로는 사고 위험이 상당히 높고 피고인이 운전한 거리가 300m에 불과해 사고 위험을 피할 만큼만 운전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또 피고인이 기사에게 내리라고 화를 내긴 했지만, 이 음주운전이 현재의 위난을 피하기 위한 이유로 보인다고 무죄 이유를 밝혔다.

검사는 피고인이 음주운전을 하기 전 지인이나 경찰에게 연락하지 않아 긴급피난이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이들이 새벽에 차량을 이동해 줄 기대 가능성이 현실적으로 높지 않다고 봤다.

형법에서 긴급피난이란 자기 또는 타인의 법익에 대한 현재의 위난을 피하기 위한 상당한 이유 있는 행위를 말한다. 상당한 이유 있는 행위가 되려면 우선 피난 행위가 위난에 처한 법익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어야 한다.

또 피해자에게 가장 경미한 손해를 주는 방법을 택해야 하며, 피난행위로 보전되는 이익이 이 행위로 침해되는 이익보다 우월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피난행위 자체가 사회 윤리나 법질서 전체에 비추어 볼 때 적합한 수단이어야 한다.

재판부는 무죄 근거로 위급한 상황에서 정차된 차량을 옮긴 음주운전 판례를 들었다. 주로 대리기사가 교통사고 위험이 있는 곳에 차량을 세워 위험을 피하기 위해 짧은 거리를 운전한 사례다.

법원은 30대 남성이 한 음주운전을 교통사고를 피하기 위한 긴급피난으로 보고 무죄를 선고했다. 음주운전 관련 일러스트. [중앙포토]

법원은 30대 남성이 한 음주운전을 교통사고를 피하기 위한 긴급피난으로 보고 무죄를 선고했다. 음주운전 관련 일러스트. [중앙포토]

2015년 12월 24일 대법원 선고를 보면 혈중알코올농도 0.059%에서 약 10m를 운전한 피고인에게 1심 재판부는 유죄를 선고했지만, 항소심에서 무죄 판결이 나왔다.

당시 피고인이 차량을 편도 3차로에서 2차로에 정차한 대리기사에게 수차례 안전한 곳으로 이동해 달라고 했지만 거부당하자 기사에게 시동을 끄고 내리라고 한 뒤 10m 떨어진 우측 도로변에 차량을 옮겼다.

항소심 재판부는 처음 차를 세운 곳이 사고 위험이 높은 곳이고, 차량 이동 거리와 혈중알코올농도를 볼 때 음주운전 시 사고 발생 위험이 크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이 사건에서 검사는 피고인이 대리기사에게 내리라고 해 화를 자초했다고 주장했지만, 대법원은 무죄를 확정했다.

싸움 관련 이미지. [일러스트 강일구]

싸움 관련 이미지. [일러스트 강일구]

2012년 12월 역시 비슷한 판결이 있었다. 피고인이 혈중알코올농도 0.077%에서 약 100m를 운전한 사건을 두고 1심과 항소심은 피고인의 여자친구가 차량을 편도 3차로 중 1차로에 세웠다는 점과 소규모 점포가 많은 혼잡한 도로였다는 점을 근거로 무죄를 선고했다.

수원지방법원과 광주지방법원은 각각 2014·2013년 피고인이 고속도로 톨게이트 정류장 부근에서 혈중알코올농도 0.123%에서 30m를 운전한 사건, 혈중알코올농도 0.150%에서 제2순환도로 20m를 운전한 사건에 무죄 판결을 내렸다.

이유는 대리운전 기사가 차량을 세운 위치가 사고 위험이 전혀 없는 안전한 곳이었다고 보기 어려운 점, 사고 위험을 줄이기 위해서였을 뿐 피고인이 더는 운전할 의사가 없었던 것으로 보이는 점, 피고인이 경찰에 신고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전화할 경우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것으로 보이는 점, 비상등을 켜두고 삼각대를 세워둬도 후속 교통사고를 충분히 방지할 수 없었을 것으로 보이는 점, 피고인이 운전할 때 교통사고 발생 위험이 크지 않았던 점 등이다.

울산=최은경 기자 chin1chuk@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