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1.5트랙 접촉 많았던 싱가포르 … 양국에 중립적 공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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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수진 기자, 싱가포르를 가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미 정상회담 개최지로 싱가포르를 언급했다. 사진은 회담장소로 거론되는 싱가포르의 마리나 베이 샌즈 호텔 모습. [중앙포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미 정상회담 개최지로 싱가포르를 언급했다. 사진은 회담장소로 거론되는 싱가포르의 마리나 베이 샌즈 호텔 모습. [중앙포토]

‘아시아의 스위스’라 불리는 싱가포르가 역사적 북·미 정상회담 개최지로 확정됐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유력 후보지로 함께 거론돼 온 판문점을 제외하면서 싱가포르로 최종 낙점됐다.

트럼프는 9일(현지시간) 각료회의를 주재하며 후보 개최지 중 하나였던 비무장지대(DMZ) 내 판문점에 대해 “거기는 아닐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그런 후 10일 트위터를 통해 시간과 장소를 공개했다.

미국선 ‘경호 용이’ 처음부터 선호

워싱턴 외교가 안팎에선 미국 측이 희망했던 싱가포르가 회담 장소로 오래전 낙점됐고, 북측의 요구 때문에 장소와 시점 발표를 미뤘다는 얘기가 나왔다.

북·미 정상회담 계획에 정통한 워싱턴 소식통은 “이미 싱가포르로 (회담 장소가) 내정된 상황이었지만 신변안전 등을 우려한 북측이 원하는 대로 공식 발표를 늦췄던 것”이라고 귀띔했다. 회담 장소와 시점 등 특급 사안이 서둘러 노출될 경우 테러 등 대내외적 돌발상황이 발생할 가능성을 우려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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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국무위원장의 경호를 위해 시간이 필요한 북한으로선 최고지도자의 동선 공개를 최대한 미루는 게 필요했고, 이것이 세계의 주목도를 끌어올려 극적인 시점에 발표하려는 미국 측의 이해와 맞아떨어진 측면도 있다.

이런 과정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강하게 판문점을 권유하고 나서자 트럼프는 이를 적극적으로 검토하는 ‘제스처’를 취했다는 해석이 있다. 싱가포르를 1안으로 가진 상황에서 문 대통령의 체면을 세워 주며 시간 끌기에 나섰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트럼프 대통령은 판문점에 큰 관심을 보였지만 백악관 참모진이 강하게 만류한 것이란 얘기도 있다. 이미 한 번 회담을 거친 곳이라 흥행성이 떨어지는 데다 중재국인 한국이 오히려 더 부각될 우려가 크다는 이유 때문이다. 특히 한국 정부 안팎에서 판문점에서의 종전 선언 방안이 거론되며 앞서나가는 데 대한 미국 측의 거부감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미·중 관계에 밝은 소식통은 “한국에선 판문점을 강하게 밀었지만 북·미 정상회담에서 한국이 더 부각되는 모양새라 미국에서는 다소 부담을 느꼈던 것이 사실”이라며 “또 판문점에서 열리면 종전 선언 논의가 남·북·미 간에 되는 것이지만 싱가포르에서 열리면 남·북·미·중으로 시작한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중국의 도움이 필요한 미국으로선 중국이 적극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자는 차원에서 싱가포르를 더 선호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북 ‘독재국가로 경제발전’ 호감도

미 실무진이 싱가포르를 최적의 장소로 밀어붙이는 데는 중립국인 데다 경호와 언론 접근성 등 인프라 측면에서 뛰어난 조건을 갖췄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블룸버그통신은 “싱가포르는 두 지도자에게 모두 중립적 영역”이라며 이미 “싱가포르는 주목할 만한 외교 행사를 단행한 역사가 있다”고 전했다. 앞서 2015년 11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마잉주(馬英九) 대만 총통 간 사상 첫 정상회담이 싱가포르에서 열린 바 있다.

2008년에는 북핵 6자회담 미국 측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와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이 회동해 북한 핵시설 검증 방식을 둘러싸고 막판 조율을 거쳤었다.

이재현 아산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싱가포르는 남중국해에서의 미국 해군 지원뿐 아니라 테러나 지역 안보 문제 등에서 미국과 적극 협력하고 있다”며 “아세안 국가 가운데서도 미·중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하고 자율성을 확대해야 한다고 가장 강력하게 주장하는 국가가 바로 싱가포르”라고 설명했다.

김 위원장의 전용기인 ‘참매 1호’가 중간 급유할 필요가 없다는 점도 이점으로 꼽혔다. 평양과 싱가포르 간 거리는 약 5000㎞인데 참매 1호의 최대 비행거리는 1만㎞다. 비행기로 6~7시간 정도면 갈 수 있다.

싱가포르는 북한 입장에서도 친숙한 곳이다.  미국 대사관뿐 아니라 북한 대사관도 있고, 북 외교관이나 고위 관료가 개인적 외유나 건강검진을 위해 자주 들르는 곳이기 때문이다. 외교 소식통은 “북한도 싱가포르를 원한 것으로 알고 있다. 북한은 싱가포르가 독재국가인데도 경제적으로 이렇게 성공하지 않았느냐며 일종의 모델처럼 꼽기도 했다”고 전했다.

북, 돌발상황 대비 발표 연기 요구

미국이 경호와 치안, 미디어 접근성 측면에서 취약하다는 이유로 꺼리는 몽골과 달리 인프라가 탄탄한 곳이란 판단도 있다.

싱가포르 매체인 스트레이트타임스는 “싱가포르는 엄격한(robust) 보안을 필요로 하고 수백 개의 미디어를 동반하는 정상회담을 치를 장소를 갖고 있다”고 했다.

싱가포르로 확정됐지만 구체적인 회담장이 어디일지에 대해서는 몇 가지 관측이 나온다. 일차적으로 거론되는 곳은 시진핑 주석과 마잉주 총통이 만났던 샹그릴라 호텔이다. 해마다 각국 국방장관급이 참석하는 안보·군사 분야의 대형 국제회의인 ‘샹그릴라 대화’가 열리는 데다 경호, 보안 여건, 언론 취재 환경 등을 골고루 갖췄다는 평가다.

중심부에 위치하지만 번화가인 오차드 로드에서 약간 벗어나 있어 경호에 유리하다는 분석도 있다. 화교계 자본이 운영하는 호텔로 규모가 크다.

트럼프 대통령의 큰손 후원자 중 한 명인 셸던 애덜슨 샌즈그룹 회장이 운영하는 마리나베이선즈 호텔도 주목된다. 이 호텔은 중심부에서 약간 벗어난 해안의 신개발지역이자 관광지인 마리나베이에 위치한 고급 호텔이다. 경영주 애덜슨은 트럼프 대통령과 각별한 관계로 알려져 있다.

스트레이트타임스는 “애덜슨은 트럼프의 측근일 뿐 아니라 트럼프에게 중동정책 결정과 관련해 조언을 해 온 인물”이라고 전했다.

다만 북측이 이 호텔에서의 회담에 동의할지 여부는 미지수다. 일반 투숙객의 출입 통제 등 문제가 있는 호텔보다 박물관이나 미술관 같은 경호시설에서 개최될 가능성도 있다.

전수진 기자

전수진 기자

싱가포르는 1975년 남과 북이 동시에 수교한 국가다. 싱가포르가 지난해 11월 국제사회의 제재에 동참하기 위해 북한과의 교역을 전면 중단하기 전까지 북한과의 교역 규모가 일곱 번째로 컸다. 북한 사람들의 무비자 입국이 가능해 외화벌이의 장소가 됐고, 북한의 무역·선박 회사도 여럿 진출해 있다.

싱가포르=전수진 기자, 서울=박유미·황수연 기자 ppangsh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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