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히딩크 체질 맞습니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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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월드컵 4강 신화의 히딩크 감독도 부임 이후 상당 기간 언론의 공격을 받았다. 특히 대표팀의 성적이 저조했던 컨페드컵 출전에서부터 유럽 전지훈련을 마칠 때까지(2001년 5~9월), 그리고 골드컵 출전에서부터 남미 전훈을 마칠 때까지(2002년 1~2월)의 두 시기가 피크였다. 많은 언론이 프랑스와 체코에 5-0으로 대패한 그를 가리켜 '오대영 감독'이라고 비아냥거렸다. 일부 언론은 '용가리 통뼈'니, '말장난의 명수'니 하는 거친 표현까지 써가며 인신공격성 비난을 퍼부었다.

히딩크는 그러나 자신에 대한 이런 평가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묵묵히 자기 할 일만 했다. 딱 한번, '최용수의 항명'이란 기사를 쓴 모 스포츠지의 기자를 향해 "당신네 신문은 쓰레기"라고 불같이 화를 낸 적은 있었다. 그는 당시 "팀의 단결을 해치고 불안의 씨앗을 심으려는 기사만큼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 나에게는 우리 팀을 보호할 사명이 있다"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 외에는 짜증을 내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고 '코드'에 맞는 기자들만 골라서 만나지도 않았다.

그는 경기에서 이기거나 지거나 일관되게 "우리의 목표는 월드컵이며, 모든 것은 이를 위한 과정일 뿐이다. 우리는 체력적으로나 전술적으로나 서서히 나아지고 있다"고 말하며 언론의 이해와 협조를 당부했다. 가끔씩 기자회견을 열어 객관적 데이터를 제시하면서 "지금까지 우리는 어떻게 해왔으며, 어떤 것을 이뤘고, 앞으로는 무엇을 어떻게 할 계획"이라는 것을 상세히 브리핑했다. 과연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도 될지 헷갈리는 상황에서 그를 비호하고 나선 것은 그의 '통치'를 받는 선수들이었다. 골드컵에서의 졸전으로 비판 여론이 높을 때 송종국.이영표 등 많은 선수들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많다. 우리는 옳은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했다.

히딩크는 대단한 고집쟁이였으나 타당한 충고에 대해서는 물러설 줄도 알았다. 처음에는 4-4-2 포메이션에 기초한 포백 수비를 고집했지만 적응하기가 어렵다는 지적이 나오자 스리백으로 전환했다. 어리고 겁없는 선수들을 중심으로 팀을 꾸려나가겠다고 하다가 팀의 구심점이 없다는 문제점이 지적되자 당초 눈밖에 두었던 '야전사령관' 홍명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약속했던 시간'인 월드컵 개막이 임박하면서 대표팀은 확연히 달라진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다. 비전문가들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자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를 폄하했던 언론들이 일제히 히딩크 예찬에 나섰다. 월드컵 개막 이후 승승장구를 거듭하자 연일 '히비어천가'가 울려퍼졌다.

히딩크는 이전에 비해 달라진 게 없었지만 '성과'가 나타나자 먼저 여론이 변했고, 또 언론이 변했다. 만약 대표팀이 졸전 끝에 예선 탈락했다면 히딩크는 '영웅'이 아니라 '역적'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히딩크는 멋지게 약속을 지켰고, '업적'을 통해 자신에게 회의적이었던 언론들을 무릎꿇렸다.

'복수'는 그 뜨거웠던 여름, 서울시청 앞에 모인 수많은 '붉은 악마'들이 대신 해줬다. 그들은 특히 악의적으로 히딩크를 비난했다고 판단한 모 언론사를 조롱하는 글귀가 쓰인 부채를 군중에게 돌리기도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최근 두 차례에 걸쳐 자신이 히딩크 체질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히딩크와의 닮은 점과 다른 점들을 열거했다. 그렇다면 언론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盧대통령은 자신이 히딩크와 닮은 점이 많다고 생각할까, 아니면 다른 점이 많다고 생각할까. 히딩크의 '언론 다루기'교훈을 다함께 되새겨봤으면 싶다.

김동균 스포츠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