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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계엄군에 집단 성폭행 당한 10대 여고생 승려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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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중항쟁 부상자동지회 초대 회장을 지낸 이지현(예명·이세상·65)씨가 1989년 2월 20일 전남 나주 남평 한 식당에서 여승이 된 A씨를 만나 5·18민주화운동 때 겪은 사연을 듣고 있는 모습. [사진 이지현씨 제공]

5·18민중항쟁 부상자동지회 초대 회장을 지낸 이지현(예명·이세상·65)씨가 1989년 2월 20일 전남 나주 남평 한 식당에서 여승이 된 A씨를 만나 5·18민주화운동 때 겪은 사연을 듣고 있는 모습. [사진 이지현씨 제공]

1980년 5·18 당시 계엄군이 여고생과 여대생, 회사원 등 여성들을 집단 성폭행했다는 증언과 기록이 잇따라 밝혀지고 있다. 5·18 당시 계엄군이 여성의 가슴을 대검으로 도려내고 잔인하게 학살한 사진이나 자료는 있었지만, 집단성폭행 등이 수면 위로 드러난 건 이번이 처음이다.

9일 한겨레는 5·18민중항쟁 부상자동지회 초대 회장을 지낸 이지현(예명 이세상·65)씨가 공개한 계엄군에게 집단 성폭행당한 A씨의 사연과 사진을 단독 보도했다. 8일 보도한 ‘지울 수 없는 5월…60여일 고문 뒤 석방 전날 성폭행’ 기사를 보고 이씨가 연락해왔다고 한겨래는 밝혔다.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이씨는 1989년 2월 20일 A씨 고향의 한 식당에서 A씨를 만났다. A씨는 ㄱ여고 1학년이었던 1980년 5월 19일 집으로 걸어 돌아가다가 군인 5명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했다.

1989년 국회 5·18 광주청문회를 앞두고 A씨의 오빠가 증인으로 출석하려던 이씨를 찾아와 “청문회에서 동생의 사연을 공개해 동생과 어머니의 한을 풀어달라”고 부탁하면서 A씨를 만나게 됐다.

이날 이씨가 A씨에게 “5·18 때 어떤 어려움을 겪었느냐”고 묻자, A씨는 고개를 숙이고 울기만 했다고 한다. 옆에서 오빠가 “공수부대 여러 명한테 성폭행을 당했다”고 하자, A씨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A씨 오빠는 이씨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한 뒤 동생이 미쳐버렸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절로 보내서 여승이 되었다”는 사연을 털어놓았다.

한겨레는 A씨의 이야기가 1991년 5월 여성연구회가 펴낸 ‘광주민중항쟁과 여성’이라는 책에도 실려 있다고 전했다. 이 책에는 “성폭행을 당한 뒤 A양은 혼자 웃어대거나 동네 사람들에게 욕설하기도 하는 등 불안 공포증을 보였다. 점차 상태가 악화돼 집을 나가 행방불명이 되기도 했던 A양은 1987년 3개월여 동안 나주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광주사태 관련자 부상 정도 판정위원회’의 추천으로 진료를 받기도 했다”고 쓰여 있다.

그 뒤 A씨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았는데, 이번에 이씨의 증언과 사진으로 승려가 됐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라고 한겨레는 전했다.

이지현(예명 이세상·65)씨가 1989년 2월 A씨를 만나 사진을 찍은 뒤 국회 광주청문회용으로 만들었다가 공개하지 못한 자료. [사진 이지현씨 제공]

이지현(예명 이세상·65)씨가 1989년 2월 A씨를 만나 사진을 찍은 뒤 국회 광주청문회용으로 만들었다가 공개하지 못한 자료. [사진 이지현씨 제공]

한겨레는 “이씨는 당시 잔혹한 범죄의 희생물이 된 A씨의 사연을 청문회에 나가 공개하기로 하고 여승이 된 A씨의 뒷모습을 사진에 담았다”며 “이씨는 그때 청문회에 나가서 전두환의 부인 이순자와 노태우의 부인 김옥숙이 웃고 있는 사진과 함께 군인들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해 여승이 된 A씨의 뒷모습이 담긴 사진을 공개하려고 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A씨의 사연은 국회 청문회 때 공개되지 못했다. 한겨레에 따르면, 이씨는 “당시 5·18단체 관계자들조차 ‘아무리 흉악한 놈들이라도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겠느냐’며 말을 믿지 않았다”고 말했다.

사진과 사연을 공개하며 이씨는 “그동안 숨겨졌던 여성에 대한 국가 폭력의 진상이 낱낱이 규명돼야 한다. 그것만이 여성들의 한을 풀어줄 수 있고,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길”이라고 말했다.

한편, 수많은 사람이 폭도로 몰려 숨졌던 당시 상황 속에서 성폭행 피해자들은 A씨 외에도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9일 5·18 관련단체와 광주지검의 진술 조서 등을 종합하면 지금까지 문서나 증언으로 확인된 5·18 당시 성폭행 피해 여성은 최소 6명이다. A씨를 포함해 여고생 2명, 회사원, 30대 초·중반의 여성 2명, 그리고 계엄군에게 붙잡혀 고문 후 성폭행 당한 김선옥씨 등이다.

5·18 당시 성폭행 관련 조사는 극히 일부에서만 이뤄졌고, 피해 여성과 가족들도 증언을 꺼리는 경우가 많아 실제 피해자는 훨씬 더 많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지영 기자 lee.jiyoung2@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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