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회 토론 과정도 생략=빌팽 총리는 1월 16일 CPE 입법 계획을 처음 발표했다. 계획이 발표되자마자 청년.학생 그룹의 대표들은 즉각 CPE 철회를 요구했다. 하지만 빌팽 총리는 작심한 듯 아예 귀를 틀어막고 독주 채비를 갖춰갔다. 프랑스 헌법에 보장된 총리의 법안 직권상정권(49조 3항)을 동원해 의회 토론 과정도 생략했다. 긴급 사안에 한해서만 쓸 수 있는 이 권한을 발동하는 바람에 새 고용법은 집권 여당이 과반을 차지한 상.하 양원에서 아무런 토론도 없이 원안대로 채택됐다.
법안 통과 직후 야당은 총리의 직권상정권을 집중 공격했다. 사회당 출신의 리오넬 조스팽 전 총리는 "(이 조항은) 민주적 사상과는 거리가 먼, 구시대 정치에서나 나오는 발상"이라고 쏘아붙였다. 학생단체들은 그들을 타깃으로 한 법이 자신들과 아무런 논의도 없이 일사천리로 통과된 것에 분노를 터뜨렸다. 프랑스대학생연합(Unef)의 브뤼노 쥘리아르 회장은 "대부분의 젊은이가 무시당했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목청을 높였다.
◆ 실업문제 해결로 대권 고지 선점 노려=빌팽 총리는 내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여권 내 유력 주자로 꼽혀왔다. 그는 지난해 6월 총리에 임명되자마자 실업문제 해결을 최우선 국정과제로 정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행정력을 집중했다. 만성적인 실업문제를 해결함으로써 대통령 선거전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는 정치적인 계산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빌팽 총리는 취임 두 달 만에 새 고용계약(CNE) 제도를 도입했다. CPE의 모태가 된 이 제도는 근로자 수 20인 미만 사업장의 경우 사용자가 입사한 지 2년 미만의 신규 고용자를 자유롭게 해고할 수 있게 했다. CNE에 힘입어 채용을 늘린 프랑스 기업들 덕분에 실업률은 불과 6개월 만에 0.6%포인트나 떨어졌다. 획기적인 개선 효과였다. 이에 고무된 빌팽 총리는 내친김에 20인 이상의 사업장에서 26세 미만의 젊은이들을 타깃으로 한 CPE까지 밀어붙이려다 그만 일을 그르치고 말았다.
◆ 개혁 좌절로 정치생명 고비=CPE 철회와 함께 빌팽 총리의 정치생명도 사실상 끝났다는 게 프랑스의 분위기다. 자신이 입안한 CPE의 최대 피해자가 된 그는 가뜩이나 개혁에 거부감이 많은 프랑스에서 또 한 명의 실패한 정치인으로 남게 됐다. 9일 발표된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빌팽 총리에 대한 국정 지지도는 한 달 만에 12%포인트가 떨어진 25%에 그쳤다. 빌팽 총리에 대한 지지도 조사 이후 최저 수준이다.
반면 빌팽 총리의 여권 내 최대 라이벌이었던 니콜라 사르코지 내무장관은 정적의 사실상 은퇴로 탄탄대로를 달리게 됐다. 빌팽 총리를 아끼고 챙겨줬던 자크 시라크 대통령도 이번 사태로 적잖이 상처를 입게 될 전망이다.
파리=박경덕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