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없는 '밀어붙이기' 대중적 저항에 부딪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0면

연초부터 프랑스 전역을 시위와 파업에 휩싸이게 했던 이번 사태는 프랑스의 자랑이었던 고용 안정성에 정부가 손을 대려 하자 학생과 노동자들이 집단적인 거부감을 드러낸 것이 그 핵심이다. 하지만 이와는 별도로 최초고용계약(CPE) 입안자인 도미니크 드 빌팽 총리가 여러 파트너와의 사전 논의 없이 독단적으로 정책을 밀어붙인 게 화를 자초했다는 지적도 설득력 있게 제기되고 있다.

◆ 의회 토론 과정도 생략=빌팽 총리는 1월 16일 CPE 입법 계획을 처음 발표했다. 계획이 발표되자마자 청년.학생 그룹의 대표들은 즉각 CPE 철회를 요구했다. 하지만 빌팽 총리는 작심한 듯 아예 귀를 틀어막고 독주 채비를 갖춰갔다. 프랑스 헌법에 보장된 총리의 법안 직권상정권(49조 3항)을 동원해 의회 토론 과정도 생략했다. 긴급 사안에 한해서만 쓸 수 있는 이 권한을 발동하는 바람에 새 고용법은 집권 여당이 과반을 차지한 상.하 양원에서 아무런 토론도 없이 원안대로 채택됐다.

법안 통과 직후 야당은 총리의 직권상정권을 집중 공격했다. 사회당 출신의 리오넬 조스팽 전 총리는 "(이 조항은) 민주적 사상과는 거리가 먼, 구시대 정치에서나 나오는 발상"이라고 쏘아붙였다. 학생단체들은 그들을 타깃으로 한 법이 자신들과 아무런 논의도 없이 일사천리로 통과된 것에 분노를 터뜨렸다. 프랑스대학생연합(Unef)의 브뤼노 쥘리아르 회장은 "대부분의 젊은이가 무시당했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목청을 높였다.

◆ 실업문제 해결로 대권 고지 선점 노려=빌팽 총리는 내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여권 내 유력 주자로 꼽혀왔다. 그는 지난해 6월 총리에 임명되자마자 실업문제 해결을 최우선 국정과제로 정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행정력을 집중했다. 만성적인 실업문제를 해결함으로써 대통령 선거전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는 정치적인 계산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빌팽 총리는 취임 두 달 만에 새 고용계약(CNE) 제도를 도입했다. CPE의 모태가 된 이 제도는 근로자 수 20인 미만 사업장의 경우 사용자가 입사한 지 2년 미만의 신규 고용자를 자유롭게 해고할 수 있게 했다. CNE에 힘입어 채용을 늘린 프랑스 기업들 덕분에 실업률은 불과 6개월 만에 0.6%포인트나 떨어졌다. 획기적인 개선 효과였다. 이에 고무된 빌팽 총리는 내친김에 20인 이상의 사업장에서 26세 미만의 젊은이들을 타깃으로 한 CPE까지 밀어붙이려다 그만 일을 그르치고 말았다.

◆ 개혁 좌절로 정치생명 고비=CPE 철회와 함께 빌팽 총리의 정치생명도 사실상 끝났다는 게 프랑스의 분위기다. 자신이 입안한 CPE의 최대 피해자가 된 그는 가뜩이나 개혁에 거부감이 많은 프랑스에서 또 한 명의 실패한 정치인으로 남게 됐다. 9일 발표된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빌팽 총리에 대한 국정 지지도는 한 달 만에 12%포인트가 떨어진 25%에 그쳤다. 빌팽 총리에 대한 지지도 조사 이후 최저 수준이다.

반면 빌팽 총리의 여권 내 최대 라이벌이었던 니콜라 사르코지 내무장관은 정적의 사실상 은퇴로 탄탄대로를 달리게 됐다. 빌팽 총리를 아끼고 챙겨줬던 자크 시라크 대통령도 이번 사태로 적잖이 상처를 입게 될 전망이다.

파리=박경덕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