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CO(암호화폐 상장)로 5000만달러 모은 뒤 잠적했던 獨 CEO, 하루만에 돌아온 이유

중앙일보

입력

새로운 암호화폐를 발행(ICO)해 수천만 달러를 모은 뒤 잠적했던 독일 핀테크 스타트업 창업자가 하루 만에 돌아왔다. 최근 빈번하게 발생하는 ICO 사기(스캠) 대한 강력한 메시지를 들고서다.

독일 최초의 ICO로 주목받았던 '세이브드로이드'(Savedroid)의 야신한키르 창업자는 18일(현지시각) 자신의 트위터에 "고마웠다! 교신 끝. (Thanks guys! Over and out)" 글을 올렸다.

출국장에 있는 자신의 모습과 휴양지에서 맥주를 즐기는 사진도 함께 올렸다. ICO를 통해 5000만 달러(약 530억원)의 자금을 조달한 직후였다.

야신 한키르 세이브드로이드 창업자가 5000만달러를 들고 잠적하기 전 트위터에 올린 사진. [사진 트위터]

야신 한키르 세이브드로이드 창업자가 5000만달러를 들고 잠적하기 전 트위터에 올린 사진. [사진 트위터]

이상한 점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회사 홈페이지엔 콘텐츠가 모두 사라지고  "그리고 사라졌다(And it's gone)"는 글귀만 떠 있었다. 이날 오전엔 이 회사 관리자 전원이 텔레그램에 개설된 ICO 그룹에서 탈퇴했다는 공식 글도 올라왔다. 한 유튜브 사용자는 텅 비어있는 회사 사무실을 촬영해 올렸다.

투자자는 뒤집어졌다. 일부 투자자는 트위터에 올라온 사진을 토대로 위치 추적에 나섰고 소셜미디어에도 한키르를 비난하는 글이 쏟아졌다.

국내 암호화폐 커뮤니티에도 "이 회사 ICO에 참여하라는 전문가 블로그를 보고 1000만원을 넣었는데 지금 죽고 싶은 심정"이라거나 "독일 업체의 ICO라 관심 있게 보다가 투자는 하지 않았지만, 트윗을 보니 화가 난다"는 글이 올라왔다.

창업자 잠적 후 세이브드로이드 홈페이지. [사진 세이브드로이드 홈페이지]

창업자 잠적 후 세이브드로이드 홈페이지. [사진 세이브드로이드 홈페이지]

모두 해프닝이었다. 투자자를 공황상태에 빠뜨린 지 하루 만인 19일 한키르는 회사 홈페이지에 동영상을 게재했다. 제목은 "그리고 사라지지 않았다(And it's not gone)"였다.

ICO를 악용한 사기에 대해 투자자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규제 당국에 높은 수준의 ICO 기준 마련을 촉구하기 위해 기획한 하루짜리 이벤트였던 셈이다.

한키르는 동영상에서 "이처럼 극단적인 캠페인을 진행한 데 대해 일단 사과한다"며 "그러나 장난하기 위한 게 아니라 ICO, 나아가 암호화폐 시장의 미래를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4개월 동안 전 세계에서 목격한 ICO 사기 사건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만큼 변화가 절실한 시점이란 메시지다.

그는 "우린 ICO를 혁신적인 스타트업의 지속가능한 자금조달 수단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며 "보다 개선된 규제나 기준이 없다면 전체 산업은 무너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달 베트남에선 ICO 사기로 7000억원 피해

세이브드로이드가 빚은 해프닝은 한편으론 ICO 시장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나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투자자에게서 돈을 조달해 '먹튀'할 수 있다는 것이다.

ICO는 새로운 암호화폐를 발행해 자금을 모집하는 것이다. 주로 블록체인 및 암호화폐 관련 스타트업이 자금조달 수단으로 많이 활용한다.

하지만 뚜렷한 가이드라인이나 법적 기준이 없어 사기 등 각종 범죄에 악용되고 있다. 미국 ICO 자문사인 새티스그룹은 지난달 "ICO의 81%가 사기"라고 분석했다. ICO 사기는 최근 들어 더욱 빈번하게 발생했다.

이달 초엔 ICO 역사상 최대 피해를 낳은 것으로 추정되는 '모던테크' 사태가 있었다. 이 회사는 베트남에서 '핀코인'과 '아이팬'이라는 두 암호화폐를 새로 발행하면서 3만2000명에게서 6억6000만 달러(약 7000억원)를 가로챘다.

아이팬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유명인을 내세운 뒤 팬들을 현혹했다. 핀코인은 매달 이윤 40%를 돌려준다며 돈을 모았다. 하지만 지난달 이 회사는 베트남을 떴고 베트남 경찰은 해당 업체를 쫓고 있다.

스위스·미국 규제 강화 추세…한국은 '말뿐인 규제'

투자자 피해가 빈번해지면서 세계적으로 ICO에 대한 규제는 강화하는 추세다. ICO 규제 선도국은 스위스다. 지난 2월 ICO 규제의 목적 및 적용할 내용을 담은 가이드라인을 상세하게 밝혔다. 단순한 규제보다는 블록체인 산업을 진흥한다는 취지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는 최근 ICO 관련 업체에 잇따라 소환장을 발부했다. 암호화폐를 법적으로 정의하고 있는 일본은 ICO를 포함한 암호화폐 매매를 하려면 암호화폐교환업자로 등록해야 한다.

반면 국내에선 진전이 없다. 정부는 지난해 9월 ICO를 전면 금지했지만 '말뿐인 규제'라는 지적이 많다. 일부 블록체인 업체는 ICO와 유사한 자금조달 행위를 하고 있다. 하지만 암호화폐에 대한 법적 지위가 불분명한 상태라 첫 단추 끼우기부터 난제다.

지난 17일 암호화폐 거래소를 심사하기 위해 자율 규제안을 만든 한국블록체인협회는 정부가 나서지 않으면 업계가 나서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전하진 블록체인협회 자율규제위원장은 "(ICO를) 하라는 것도 아니고 하지 말라는 것도 아닌 애매한 정책을 펴는 정부를 비판하고 싶다"며 "산업을 잘 키우면 해외 자금 유치 효과도 있을 텐데 지금은 싱가포르 등으로 일자리와 세금이 빠져나가고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새누리 기자 newworld@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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