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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 스탈린그라드 전투 … 스탈린, 어떻게 히틀러 이겼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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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6호 25면

[박보균의 현장 속으로] 리더십의 결정적 순간들 - 20세기 잔혹한 지도력 간 격돌

볼고그라드 마마예프 쿠르간의 결사항전 조각상. 뒤쪽 거대한 조각상은 ‘조국의 어머니가 부른다!’

볼고그라드 마마예프 쿠르간의 결사항전 조각상. 뒤쪽 거대한 조각상은 ‘조국의 어머니가 부른다!’

전쟁은 리더십 결전장이다. 피의 드라마다. 저항과 투혼, 파탄과 절망이 얽힌다. 스탈린그라드는 그것의 격렬한 압축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주무대는 동부전선. 독일 히틀러 대 소련(현 러시아)스탈린의 격돌이다. 2월 2일은 소련의 스탈린그라드 승전 기념일. 2018년 그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볼고그라드(옛 스탈린그라드)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75년 전 불굴의 정신과 용기가 이룬 영웅적 승리다.” 나는 지난해 가을 기억의 현장을 찾았다.

피의 서사시, 양군 사상자 200만 #소련군 역포위 작전 성공으로 #독일군 항복, 2차대전의 전환점 #스탈린, 실용과 인내심 단련 #이념적인 수치심이 없었다 #히틀러는 자기 환상의 포로 #붉은 군대 잠재력 경시했다 #올해 75주년 승전기념 현장서 #푸틴, ‘강한 러시아’ 다짐

볼고그라드는 수도 모스크바에서 남쪽 910㎞쯤 아래다. 비행기로 1시간40분. 공항은 아담하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 플래카드가 눈에 띈다. 세르게이 살렌코(59세)가 나를 맞았다. 그는 도시역사보존회 간부다. 살렌코는 “영웅도시 스탈린그라드의 이름이 흐루쇼프 집권 시절(1961년) 볼고그라드(볼가강 도시)로 바뀌었다. 그것은 스탈린 공포통치에 대한 역사의 단죄였다”고 했다.

스탈린(左), 히틀러(右)

스탈린(左), 히틀러(右)

우리의 첫 행선지는 도심의 ‘스탈린그라드전투 파노라마’ 박물관. 앞에는 볼가 강, 뒤쪽엔 붉은 벽돌의 듬직한 5층 건물이 있다. ‘게르하르트 제분(製粉)소’다. 지붕, 창문은 없다. 전쟁의 상흔이다. 외벽은 총알 구멍과 포탄 자국의 범벅. 그대로 보존했다. 전투의 참혹함을 증언한다. 나는 험악한 역사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알아야 2차대전을 안다.”- 안내문 구절이다. 살렌코는 “여기서 소련군의 평균수명은 24시간, 독일군은 7초마다 한 명씩 죽었다. 단일 전투로는 최악의 참상이다. 노르망디 작전의 서부전선(독일 대 영·미군)과는 처참함의 차원이 다르다”고 했다.

1941년 6월 나치 독일은 소련을 침공했다. 폴란드침공(39년 9월)→프랑스 파리함락→영국공략 실패 이후의 움직임이다. 히틀러는 야수적 세계관을 표출했다. “열등 인종과 공산주의 볼셰비즘을 없애는 절멸(絶滅) 전쟁이다.” 소련 슬라브족과 유대인 말살→우크라이나 곡창지대점령→독일 아리안(게르만족)의 생활공간 확보다. “히틀러는 사회공학(social engineering)을 추구했다.”(폴 존슨 『모던 타임스』) 전쟁의 성격이 달라졌다. 파멸적 참화가 예고됐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독일군(Wehrmacht)의 전격전은 파죽지세였다. 모스크바 앞에서 꺾였다. 혹독한 겨울 탓이다. 전시실에 “소련 크라스나야 아르미야(Красная aрмия·붉은 군대)가 악랄한 파시스트를 막았다”고 적혀있다. 도쿄의 소련 스파이 조르게의 정보도 결정적이었다. “일본 공격 방향은 남방·미국이다.”스탈린은 극동 50개 사단을 모스크바 방어에 투입했다. 전선은 교착상태로 바뀌었다.

1942년 6월 독일의 목표는 한쪽에 집중됐다. 소련 남부 캅카스(코카서스)와 볼가강 지역. 자원(카스피해 유전)과 물류장악이다. ‘블라우(Blau·청색)작전’이다. 스탈린그라드는 공업과 교통 요충지. ‘스탈린의 도시’ 이름은 히틀러의 자존심을 자극했다.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사령관의 6군은 8월 도시 부근으로 진격했다. 8월 23일 급강하 폭격기 슈투카가 날았다. 1200대의 독일 비행기가 사흘간 폭탄을 퍼부었다. 도시 전체가 파괴됐다. 불덩어리로 변했다.

성공은 역설이다. 건물 잔해가 소련군에 유리한 엄폐물이다. 주력은 62군, 사령관은 바실리 추이코프. 그는 “적의 장점을 최대한 약화시키자”고 했다. 지피지기(知彼知己)는 위기탈출을 보장한다. 코미사르(당 정치위원) 흐루쇼프는 추이코프를 뒷받침했다. 독일군은 근접전을 꺼렸다. 추이코프는 육탄전, 저격수 전투에 주력했다. 소련군은 벽돌 더미를 오가며 기습했다. 독일군 전술은 전차와 보병의 협동. 그 장점이 헝클어졌다. 박물관 건너편 ‘파블로프의 집’은 그런 전투의 상징이다. 거기서 하사 파블로프와 병사 25명은 58일간 독일군을 막았다.

지난 2월 2일 스탈린그라드 승전 75주년,?조국의 어머니?상 기념식장에 선 푸틴 러시아 대통령. [중앙포토]

지난 2월 2일 스탈린그라드 승전 75주년,?조국의 어머니?상 기념식장에 선 푸틴 러시아 대통령. [중앙포토]

러시아는 2차대전을 ‘대조국 전쟁’으로 부른다. “스탈린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상투적 언어(clichés)에서 벗어나 레토릭을 교체할 필요성을 깨달았다.” (안토니 비버 저서 스탈린그라드) 스탈린은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영웅 쿠투조프’를 외쳤다. 쿠투조프는 1812년 나폴레옹 침공을 물리쳤다(첫 조국전쟁). 서사시적 언어는 격정의 애국심을 낳는다.

우리는 도심 북쪽 ‘마마예프 쿠르간(Мамаев курган)’으로 갔다. 그 언덕(해발 102m)까지 계단은 200개(200일 전투 뜻함). 엄청난 석상이 나온다. 이름은 ‘조국의 어머니가 부른다!’ 고대 그리스 여신상 형태다. 1967년 완공했다. 높이가 85m(칼33m+어머니상52m). 관광객들을 압도한다. 미국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은 46m. 살렌코의 설명은 인상적이다. “칼을 높이 든 어머니가 조국수호에 나선 아들·딸들을 독려하는 모습이다. 붉은 군대의 투혼은 러시아인의 자기희생과 자발적인 복종심, 파시스트 침략자에 대한 적개심이 뭉쳐졌다.” 도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피의 격전지였다. 여덟 번 빼앗기고 되찾았다.

마마예프 공원 중간은 ‘결사 항전’ 구역. 근육질 병사의 조각상(15x12m)은 강렬하다. 불퇴전의 결연한 표정이다. 한 손에 수류탄, 다른 손에 따발총(PPsh41기관단총)을 쥐고 있다. 옅은 미소는 적에 대한 증오와 경멸을 담고 있다. 이어서 ‘폐허의 벽.’ 벽에서 따발총과 ‘스탈린 오르간’(다연장 로켓포 카추샤)소리, 군가가 얽혀서 퍼진다. 벽에 새긴 병사의 다짐이 있다.

붉은 벽돌 제분소는 파괴된 채 남아 있다. 그 앞은 춤추는 소년·소녀상, 바르말레이(Бармалей)분수대. 전쟁 기억의 상징들이다.

붉은 벽돌 제분소는 파괴된 채 남아 있다. 그 앞은 춤추는 소년·소녀상, 바르말레이(Бармалей)분수대. 전쟁 기억의 상징들이다.

“Ни шагу назад(니 샤쿠 나자트,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

소련군의 저항력은 경이적이었다. 여기엔 엔카베데(내무인민위)의 감시·억압도 작용했다. “포로가 되면 반역(traitor)으로 자동 분류됐다.” (로버트 서비스 『스탈린』) 스탈린의 아들 대위 야코프는 독일군 포로가 됐다. 그도 반역자가 됐다. 스탈린주의와 나치즘은 악마적 이념이다. 그 공간엔 제네바 협정도 소용없다. 서로가 포로들을 잔인하게 처형했다.

모스크바 크렘린의 지휘본부 스타프카(Ставка)의 주요 멤버는 게오르기 주코프(최고사령관 대리)와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총참모장). 국가 지도자 스탈린은 실용성을 단련했다. “히틀러와 비교할 때 스탈린의 장점은 이념적 수치심이 없다는 것이다(lack of ideological shame).” (안토니 비버 『스탈린그라드』)

독일 총통 히틀러는 자기 환상의 포로다. 그는 자신을 군사천재로 설정했다. 전투의 세부사항까지 간섭했다. 히틀러는 소련의 잠재력과 복원력을 평가절하했다. 10월 중순 독일군은 도시의 90%를 점령했다. 소련군 상황은 악전고투다. 스타프카에선 역공 전략을 짰다. 단순 방어책이 아니다. 독일군을 역(逆)포위하는 것이다. 공세적 상상력은 대담한 역전승을 생산한다.

T-34 전차를 앞세워 역포위 공격에 나선 소련군.(그림)

T-34 전차를 앞세워 역포위 공격에 나선 소련군.(그림)

1942년 11월 19일, 천왕성(Ур н·우란)작전이 시작됐다. 100만(대포 14,000문, 전차900대, 항공기1000대)의 새로운 군대가 독일군을 포위공격했다. 소련군의 첫 공략대상은 독일의 추축국 루마니아 군대. T-34 전차들이 돌진했다. 허약한 루마니아군은 무너졌다. T-34는 필승신화다. 간단한 구조, 고장이 없다. 캐터필러가 넓다. 눈밭의 기동성도 뛰어나다. 러시아의 단순성은 위대하다. 독일의 천재성을 압도했다.

독일 6군은 앞뒤에서 갇혔다. 사령관 파울루스는 우유부단했다. 그는 돌파·철수를 요청했다. 히틀러는 도시의 상징성에 집착했다. 사수 명령을 내렸다. 1943년 1월 30일 그는 파울루스를 원수로 진급시켰다. 묵시적 자살 지시다. 독일군 원수가 항복한 전례는 없었다. 하지만 다음날 파울루스는 투항했다(2월 2일 전투 종료). 히틀러의 치명적인 역전패다. 참화의 기록은 끔찍했다. 전체 사상자(죽음+부상) 200만 명 (소련군 113만, 독일과 추축국 85만). 이 중 소련군 전사자는 48만, 민간인 4만 명이 숨졌다. 독일군 20만 명이 죽었다.

전시실 문구는 압도적이다. “스탈린그라드 승리는 2차대전 흐름을 바꾼 거대한 전환점이다.” 붉은 천의 테이블 위에 항복 문서가 놓여있다. 하켄크로이츠(갈고리십자가)·독수리 문양·철모·기관총이 보인다. 패망한 나치의 초라한 몰골이다. 소련군의 초상화는 공적·계급순이다. 주코프 원수가 단연 앞선다. 스탈린 동상은 러시아에서 거의 사라졌다. 이곳 박물관은 예외다. 살렌코는 “러시아인들은 이중적이다. 잔혹한 스탈린 시대를 경멸하면서 그 시대의 강한 조국상을 그리워한다”고 했다. 푸틴의 장기집권은 그런 기대와 열망의 집약이다.

볼고그라드·모스크바(러시아)=글·사진 박보균 대기자 bg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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