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우등생의 자살|이덕영<사회부 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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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점수 따기와 등수 다투기 교육에 눌린 학생들의 자살이 잇따라 자녀를 가진 부모는 물론 사회에 큰 충격을 던진다. 입시 일변도의 교육이 아이들을 병들게 하고 있다는 지적은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지만 최근 이틀이 멀다 하고 여기저기서 일어나는 중·고생자살사건을 보면 한순간의 충격으로 흘려 보낼 수 없는 심각한 상태라는 느낌이다.
10대를 죽음으로 내모는 병은「골찌」에게서 나타나는 증상만도 아니다. 줄곧 전교1등을 해 온 학생들도「자리 지키기」에 대한 강박감을 견디다 못해 그만 목숨을 끊기까지 한다. 학업고민자살을 이제 「심약한 10대」개개인의문제로만 버려 둘 수 없게 됐다.
우리 학생들은 교육목표의 상실과 이에 따른 교육제도 및 교육현장의 구조적 모순에서 비롯된 중범을 앓고 있는 것이다.
「공부=일류대학=출세=행복」이라는「경쟁등식」에 길들여진 학생들은 등수 다투기 외에 교육에서 다른 의미를 찾지 못한다. 대부분의 부모와 교사들이, 아니 우리 사회가 학생들을 그렇게 만들고 있다. 이 같은 가혹한 경쟁의식은 「나는 살 가치도 없다」는 결론에도 쉽게 이르게 한다.
교육목표의 실증은 어느 틈엔 가 우리 교육현장을 크게 왜곡시켜 놓았다. 일률적 보충수업이나 강요된 자율학습처럼 비뚤어진 교육목표에 맞게 굳어진 제도. 점수 따기 경쟁에 멍든 학생들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하는 비교시험, 우열반 편성, 성적순 도서실좌석 지정….
며칠전 경기도의 한 고교생이『우수생만 도서실을 이용하게 할 것이 아니라 공부 못하는 학생들에게도 자리를 달라』고 건의했다가 교사로부터『억울하면 공부하라』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아 자살했다는 소식은 우리의 병든 교육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경쟁논리만이 통용되는 교육현장.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 난 성적순위라는 올가미에 들어가 허위 적 거리며 살아가는 삶에 환멸을 느낀다며 2년 전 그릇된 교육풍토에 항변하며 스스로 15년의 짧은 생을 마감했던 한 우등생 소녀의 절규가 아직도 생생하다.
인간을 위한 인간을 만드는 교육의 회복이 민주화시대를 맞은 교육계의 급선무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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