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만에 되찾은 「합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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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70년말 22살의 재단사 전태일이 분신할 당시, 서울청계천평화시장 봉제공장「시다」들은 하루 14시간 노동에 일당은 그 당시 코피 한잔 값인 50원을 받고있었다.
먼지구덩이 다락방에서 온종일 햇빛 한번 보지 못하고 타이밍약을 먹으며 쏟아지는 졸음과 싸워야했다.
움푹 패인 볼에 기관지염·안질·위장병은 「시다의 꿈」을 갉아먹었고, 끝내는 전씨 분신의 계기가 되었다.
70년11월13일 전씨는 허울뿐인 「근로기준법화형식」을 갖기로 하고 『근로기준법을 지져라』『내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며 몸에 석유를 붓고 성냥불을 댕겼다.
그로부터 18년 뒤인 27일 오후6시30분쯤. 서울창신2동. 말끔하게 단장된 신축4층 건물의 1층으로 「전태일기념관」이 이사, 집들이를 하게됐다.
이제는 「노동자의 어머니」로 더 잘 알려진 전씨의 모친 이소선여사는 『한사람이라도 살아남아 싸워야한다』며 애타게 절규한다.
「전태일기념사업회」의 영향으로 최근 설립된 제화공·인쇄공 노조원등 1백여명의 참석노동자들은 「죽지 않고 살아서 싸워야 한다」는 이여사의 말에 여기저기서 대답을 한다.
『이제 노동자의 의식과 조직력은 아무도 막을 수 없어요. 죽긴 왜 죽어요.』
전씨의 죽음으로 결성된 청계피복노조는 81년1월 5공화국정권에 의해 강제 해산된 이래, 8년여간의 힘겨운 근로자들의 싸움 끝에 지난2일 합법성을 되찾았다.
『강제 해산되기 전 평화시장은 다락방도 없어지고 일요일근무도 없어졌는데, 조합이 해산되자 근로조건은 70년대 초의 상황으로 다시 돌아갔어요.』
「청피노조」의 합법화와 전태일기념관의 이전이 있고 난 뒤, 평화시장 근로자들 사이에선 전씨가 화형식에 처했던 근로기준법을 노동현실에 적용하라는 「근로기준법 부활운동」이 한창이다.

<전영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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