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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비핵화 선대 유훈” 노동신문은 “핵보유 정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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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정부 당국자들은 7일 대북 특사단이 가져온 결과에 대해 “북한이 기대 이상의 전향적 태도를 보였다”고 입을 모았다. 핵은 흥정 대상이 아니라던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비핵화를 협상 테이블에 올릴 용의가 있다고 밝힌 것은 명확한 변화다. 북·미 간에 최소한 탐색적 대화가 가능할 것이라는 전망도 그래서 나온다.

하지만 특사단의 언론 발표문을 보면 ‘전향적 변화’로만 볼 수 없는 표현들이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특사단 언론 발표문에 숨은 함정 #북한 “안전 보장하면 핵 포기” #‘미국 탓 핵보유’ 기존 입장과 같아 #‘대화 기간 추가 도발 없다’ 발언 #대화 결렬 땐 도발로 나올 수도 #전문가 “합리적 검증, 압박 지속을”

발표문 3항 중 “북측은 한반도 비핵화 의지를 분명히 했다”는 부분을 정부는 주목하고 있다. 김정은이 육성으로 비핵화 의지를 언급한 것은 사실상 처음이다. 하지만 2012년 2·29 합의 때도 김정은은 ‘비핵화를 위한 사전조치’까지 약속하고선 4월 장거리 로켓인 은하 3호를 쏘아올렸다. 2·29 합의는 미국이 대북 식량지원을 하는 대가로 우라늄농축프로그램(UEP) 중단 등 비핵화 사전 조치를 취하는 게 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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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이날 북한 주요 매체들은 김정은이 말했다는 ‘비핵화’에 대해선 일절 보도하지 않았고, 오히려 노동신문은 ‘조선의 핵 보유는 정당하며 시비거리로 될 수 없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미국의 핵위협 공갈책동에 대처하여 취한 우리의 핵억제력 강화 조치는 정정당당하다”고 주장했다.

또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지난 6일 기자들과 만나 “김정은이 선대의 유훈에 변함이 없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선대의 유훈’은 상용구에 가까운 선언적 표현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5년 6월에도 방북한 정동영 통일부 장관에게 “한반도 비핵화는 선대의 유훈이며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이듬해 1차 핵실험을 감행했다.

3항 중 북한이 “군사적 위협이 해소되고 체제 안전이 보장된다면 핵을 보유할 이유가 없다”고 한 것은 논란이 될 소지가 있다. ‘군사적 위협’은 그간 북한이 주한미군과 한·미 연합훈련 등을 문제 삼으며 썼던 논리다. 군사적 위협의 해소는 주한미군 철수를 뜻하는 것일 수 있다. 최강 아산정책연구원 부원장은 “이는 핵을 보유하는 게 미국의 적대시 정책 때문이라는 기존 북한의 입장을 앞뒤만 바꿔 다르게 포장한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발표문 5항은 “대화가 지속되는 동안 북측은 추가 핵실험 및 탄도미사일 시험발사 등 전략 도발을 재개하는 일은 없을 것임을 명확히 했다”고 돼 있다. ‘대화가 계속되는 동안’이라는 조건이 붙은 게 문제다. 북한으로서는 ‘대화가 결렬되면 도발할 수 있다’는 일종의 정당성을 확보한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실험의 중단’이지 ‘개발의 중단’은 아니다. 국책 연구소 관계자는 “추가 실험 없이도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 완성에 필요한 대기권 재진입 기술이나 종말 유도 기술은 확보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신각수 전 주일 대사는 “대화가 개시돼도 김정은이 신년사에서 밝힌 핵탄두 및 미사일의 대량 생산과 실전 배치는 계속될 것”이라며 “이번 결과가 진전은 맞지만 곳곳에 북한의 덫이 놓여 있는 만큼 대화를 하면서도 합리적 검증을 계속하며 압박을 지속해야 한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특사단의 결과물이 ‘합의문’이 아니라 ‘언론발표문’이라는 형식으로 나온 것을 주의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영수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문서로 규정한 합의가 아닌 만큼 나중에 북한이 입장을 바꾸며 핑계로 쓸 여지가 있다”며 “말보다 핵 실태 파악, 검증과 사찰 등이 중요하다는 점을 정부는 염두에 둬야 한다”고 말했다.

유지혜·박유미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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