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라이스까지 나서 구명운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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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직한 방향으로 해결하시길 바랍니다."

공손함 속에 서릿발이 밴 말투였다.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이 23일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한 말이다.

이슬람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혐의(배교)로 붙잡혀 재판을 받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인 압둘 라흐만(41.사진) 사건에 대해 우려를 표시한 것이다. 라흐만은 배교자를 사형시킬 수 있는 이슬람법(샤리아)에 근거한 아프가니스탄 법률에 따라 죽음에 직면해 있다.

라흐만은 25세 되던 1990년 파키스탄에서 아프가니스탄 난민구호 국제기독교단체를 돕다가 기독교로 개종했다. 3년 뒤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은 기독교인이 된 라흐만을 국외로 추방했다. 라흐만은 9년간 독일 망명 끝에 탈레반 정권이 몰락한 다음해인 2002년 수도인 카불로 돌아왔다. 그러나 지난달 두 딸의 양육권 분쟁으로 경찰조사를 받던 중 기독교 성경을 소지한 사실이 드러나 체포됐다. 아프가니스탄 국내 여론은 "개종은 이슬람에 대한 모독인 만큼 엄단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아프가니스탄 독립인권위원회도 라흐만의 처형을 주장하고 있다.

사태가 처형 쪽으로 흐르자 백악관이 제동을 걸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22일 "이슬람에서 개종한 사람이 처벌받을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매우 당혹스러웠다"며 "아프가니스탄이 신앙의 자유라는 보편적 원칙을 존중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여기에 라이스 장관까지 가세한 것이다.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국내 여론과 대외 관계를 놓고 저울질 중이다. 22일 이 사건을 담당한 검사는 "라흐만이 미쳤을 수도 있다"는 말을 슬쩍 흘렸다.

피고인의 정신상태를 이유로 재판을 기각하는 '우회적 해결책'을 시사한 것이다. 그러나 이슬람 지도자들은 "배교자를 풀어주면 봉기가 일어나 카르자이 대통령을 날려버릴 것"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 이슬람에서 배교=이슬람은 가장 큰 범죄를 살인.간음.중상모략.절도.강도.음주.배교 일곱 가지로 규정하고 있다.

이는 사형에 처해질 수 있는 중범죄다. 그러나 이슬람법은 유연성을 가지고 있다. 배교자가 진정으로 뉘우치고 사죄하면 사형을 면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때문에 배교로 인해 사형에 처해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대부분 재판이 시작되기 전에 개종 사실을 부인한다. 이 때문에 배교를 놓고 재판이 열리는 경우는 드물다. 아프가니스탄에서도 배교자를 재판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워싱턴.카이로=강찬호.서정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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