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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in] 행복한 바보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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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아파트 담벼락보다 흙 한줌을 택했다. 좋은 음악 혼자 듣기 아까워 전 재산을 '올인' 했다. 이웃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 훤히 아는 그들. 오늘도 헤이리엔 '행복한 바보들'이 웃고 있다.

2004년 헤이리에 2층짜리 살림집 '바우재'를 지어 들어온 미술평론가 이주헌씨. 일산에 살다 아파트를 팔고 헤이리에 들어왔다. 오래 전부터 "아이들이 흙 냄새를 맡으며 이웃과 어울려 살았으면"하는 소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2년이 흐른 지금, 그는 헤이리의 삶에 무척 만족해한다.

"헤이리는 이웃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 젓가락이 몇 개인지 안다는 옛 말을 실감할 수 있는 마을입니다. 누가 뉘집 아이인지, 누가 어느 집 어른인지도 알고요. 전통적인 의미의 공동체적 삶이 이뤄지고 있지요."

헤이리에서는 앞집에 누가 사는지 알지 못하는 아파트 생활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낯선 광경이 자주 벌어진다. 한 달에 한 번씩 공회당 격인 커뮤니티 하우스에서는 주민 회의가 열린다. 말하자면 자발적인 반상회다. '공터를 어떻게 가꿀 것인가'에서부터 '외부에서 찾아오는 손님들에 어떤 프로그램을 제공할 것이냐'까지 다양한 사안을 논의한다. 아파트 단지처럼 불참자에게 벌금을 물리지 않아도 참여도는 높다. 정월대보름이나 추석 같은 명절마다 열리는 마을축제에는 동네 사람들이 모두 참여해 팔씨름이나 줄다리기를 한다. 토요일마다 열리는 풍물 강좌에서 사물놀이를 배운 아이들이 송년 행사때 발표회를 하기도 한다. 매달 마지막주 일요일 오전 8시에는 어른.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나와 마을 청소를 한다. 최근에는 일요일 오후에 어른들끼리 스포츠 댄스를 배우고 있다.

이씨는"헤이리에 살고 있는 40대들 다수가 '돈벌이에 너무 매몰되지 말고 좀 다르게 살아보자'며 이 곳에 온 사람들"이라고 소개했다. 그래서 자녀교육이나 인생관에서도 세태에 구애받지 않는 여유를 보인다. 이씨의 네 아이 중 둘째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홈스쿨링(학교를 다니지 않고 집에서 공부하는 것)을 하고 있다. 공작에 취미가 있는데, 학교에서는 하고 싶은 것을 할 수가 없어서다. 그는 "헤이리같은 분위기가 아니었다면 홈스쿨링을 결심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가 하면 마음 맞는 이웃들과 좋아하는 것을 나누며 노후를 보내고자 하는 이들도 있다. 음악감상실 '카메라타'를 연 방송인 황인용씨나 정치박물관을 운영 중인 신명순 연세대 교수(정치외교학)가 여기에 속한다. 잘 알려진 클래식 음악 애호가인 황씨는 늘 "좋은 음악을 나 혼자 듣기는 아깝다"고 생각해오던 차에 신문에 난 헤이리 기사를 보고 139번째 회원이 됐다. 그는 집을 짓기 전 김언호 한길사 대표를 따라 네 차례나 해외로 건축 투어를 다녀올 정도로 열성적인 회원이다. 카메라타에는 황씨가 평생에 걸쳐 모은 고전음악 LP 1만여 장과 1938년산 매킨토시 스피커가 음악애호가들을 기다리고 있다. 신 교수는 '아고라'라는 박물관에 30여 년간 수집한 국내.외 정치 자료 2000여 점과 우표 1만여 장을 전시하고 있다.

헤이리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사람들이 전원주택을 지었다"는 오해를 받을 때가 제일 곤혹스럽다고 했다. 여기 온 사람 중에는 강남이나 분당에서 살던 사람들도 있다. 대개 전 재산을 처분해 '올인'했다. 은행 대출을 받은 사람도 있다. 전시장 겸 아트숍 '아트팩토리' 주인 황성옥씨는 오랜 꿈인 자유로운 전시 기획을 위해 살던 집을 처분하고 은행 빚을 냈다. 늘 어린이 미술관을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갤러리가 밀집한 서울 인사동이나 사간동에는 그런 공간을 얻기가 불가능했다. 최만린 이사장은 이런 헤이리 사람들을 "바보같은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물론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지혜로운 사람들이라는 반어법일 것이다. 헤이리 중심부에 위치한 서점과 레스토랑, 전시장이 있는 복합문화공간 '북하우스'한 켠에는 고은 시인의 축사가 써 있다. '나는 이 곳에서 혼자가 아닙니다. 나는 이곳에서 당신의 당신입니다. 두 사람의 헤이리.' 혼자가 아니기에, 헤이리의 '바보'들은 더욱 행복하다.

파주=기선민 기자

똑같은 건물은 없다 … 예술이 된 마을

"헤이리는 마을 전체가 예술이다."(방송인 황인용씨)

그만큼 헤이리에 들어선 개별 건물들은 건축적으로 개성을 자랑한다. 똑같이 생긴 건물은 하나도 없다. 국내 34명, 외국 14명의 건축가들이 매만진 헤이리의 건축물은 '사람과 자연이 공존하는 길'을 모색하는 마을 전체의 컨셉트를 고스란히 대변한다. 건축학도들의 견학 명소가 된 주요 건물들을 살펴본다.

◆갤러리 모아=커다란 육각형 상자가 허공에 뜬 것 같은 독특한 모양의 전시장이다. 헤이리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축물 중 하나로 꼽힌다. 건축가 우경국씨가 설계했다. 아트숍.카페.살림집이 함께 있다.

◆북하우스=한길사가 운영하는 복합문화공간. 커다란 책 같기도 하고 나무가 빼곡히 들어찬 숲 같기도 한 외관이 일품이다. 1층은 프렌치 이탈리안 레스토랑 '포레스타', 2층은 서점, 3층은 카페. 뉴욕의 유명 건축가집단 SHOP과 한국예술종합학교 김준성교수가 공동설계했다. 서점에는 한길사가 그동안 펴낸 출판물이 전시돼 있다. 책 공예의 명장(名匠)으로 불리는 윌리엄 모리스 박물관도 마련될 예정이다.

◆갤러리 이비뎀=두 개의 상자를 엇대어 놓은 듯한 형태의 전시장. 감각적인 실내 디자인으로 영화 '누구나 비밀은 있다'에서 주인공 이병헌의 방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카페도 함께 있다. 김헌 예다건축 소장이 건축을 맡았다.

◆규원=건축가 승효상씨가 설계한 도자기 전시장 겸 찻집. 산업도자와 도예 분야에서 활동했던 김정복씨가 운영한다. 건물 외벽 전체를 동판을 인위적으로 부식시킨 내후성 강판으로 덮어씌웠다. 그래서 녹슨 듯한 색깔이 자연스러우면서도 독특하다.

◆고막원=반원형 돔지붕이 멀리서도 눈길을 끄는 선인장 하우스다. 키 큰 선인장을 위해 중앙을 위층까지 시원하게 뚫었다. 선인장 구경과 구입 모두 가능하다.

◆Lee & park 갤러리=이경형 서울신문 고문과 박옥희 이프토피아 대표 부부의 집. 상자 여러 개를 이어놓은 것 같은 건물 1층에는 전시장이, 2층에는 살림집이 있다. 2층 거실과 서재 사이에 자연과 함께 숨쉴 수 있는 공간인 중정(中庭)을 만들어놔 눈길을 끈다. 이종호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의 작품.


Q&A

Q.마을 이름 '헤이리'는 무슨 뜻인가.

A.경기 파주 지역의 전통 농요 '헤이리 소리'에서 유래한 순 우리말. '헤이리'는 특별한 의미가 없는 후렴구다.

Q. 헤이리의 모델이 됐다는 영국의 '헤이온와이'는 어떤 곳인가.

A. 영국 웨일스와 잉글랜드 경계에 위치한 작은 마을. 주민 1500여 명이 헌책방 39개를 운영하고 있다. 원래 폐광촌이었는데 옥스퍼드대를 졸업한 한 청년이 책마을 만들기 운동을 벌여 오늘날의 모습이 됐다. 영국의 대표적 관광 명소 중 하나다.

Q. 헤이리 회원은 몇 명이며, 어떤 사람들인가.

A. 현재 370여 명이다. 영화감독 박찬욱, 사진작가 배병우, 소설가 윤후명, 탤런트 최불암.김미숙, 화가 임옥상, 영화감독 강우석.강제규 등 숱한 문화계 인사들이 포함돼 있다. 2004년 '나쁜 남자'의 김기덕 감독과 가수 윤도현씨가, 지난해는 탤런트 유동근.전인화 부부가 합류했다.

Q. 건설 현황은.

A. 80여 채가 완성됐다. 현재 건축 중인 집이 30여 채, 설계 중이거나 곧 착공에 들어갈 집이 100여 채쯤 된다. 회원들의 개인 사정에 따라 건축 일정이 변하기 때문에 정확히 언제 완공된다고 말하긴 힘들다.

Q. 주민들이 헤이리에 들어가는데 든 비용은.

A. 입주 비용은 토지 구입비와 주택 건축비 등으로 이뤄지는데, 집집마다 천차만별이다. 입주 초기에는 토지가 평당 100여만 원선, 건축비가 300만~500만원 선이었다고 한다. 대략 4억~5억원 선이 많다고 한다.

Q. 회원들은 모두 헤이리에 거주하나.

A. 그렇지 않다. 현재 입주한 80여 가구 중 70%가량만 헤이리에 살고 있다. 나머지는 매일 출퇴근하거나 주말에 주로 온다.

Q. 지자체들이 헤이리에 관심을 보인다던데.

A. 부산광역시, 광주광역시, 충남 연기군, 충북 제천시, 경기도 포천시, 경남 김해시 등 지자체에서 헤이리 같은 마을을 만들고 싶다며 담당 공무원을 파견해 조사해갔다. 올 초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청에서도 벤치마킹해갔다.

Q. 헤이리를 찾아가려면.

A. 승용차의 경우 자유로를 타고 성동 IC에서 빠져나온 뒤 '예술마을 헤이리'표지판을 따라 성동사거리에서 좌회전하면 된다. 버스를 탈 경우 서울 합정역이나 일산 대화역에서 200번 버스를 타면 된다. 사무국 연락처는 031-946-85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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