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여기 묻힌 광주 5·18 망월동묘역|망월동비문엔 절규의시 가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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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광주여, 무등산이여, 민주의 활화산이여!』
광주망월동, 1백26기의 광주항쟁희생 영령들이 묻힌 묘지는 이제 「민주의성지」로 뚜렷이 자리잡았다.
전국의 대학생·시민들이 참배의 순례행렬을 잇고 있는 망월동묘지 그「이름없는 주검」들의 머리맡에 새긴 비명은 그대로 산자들의 마음속에 새긴 「80년5월의 그날」이기도 하다.
비탄과 좌절과 죽음을 넘어 승리와 부활을 다짐하는 그 피로쓴 글월들-. 묘비명을 통해 그날의 광주를 되새겨본다.
『고난과 아픔을 싫어하고/멋있고 안일만을 살려는 오늘의 마음들/비인간화의 악폐와 소외의 먹구름이/짙게 깔린 그곳 그것들을 떠나 광야로간 세례요한/나는 나의자리에서 기독자로 현존하는가! 당신의 아픔을 아프게하소서/십자가로부르는 음성을 듣게하시고/당신의 눈빛을 불태웠던것들을/외면치말게 하소서/죽어서 길이산 고운님/우리들 가슴속에 오롯이 브니엘로 피소서냄(광주상무교회전도사로 일하다 80년 5월27일 계엄군의 총에 맞아 숨진 고 문용동씨의 묘비문)
『여보/ 당신은 천사였오/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진홍아빠가.』 묘지번호 135 최미애. 80년5월21일 학생들이 데모한다며 집을 나간 교사남편을 집앞에서 기다리다 총에 맞아 숨졌다. 당시 최씨는 임신 8개월. 살아남은 교사남편은 두 생명을 한꺼번에 잃고 통곡을 묘비에 새겼다.
묘지번호 29, 홍비호. 64년1월27일생. 80년5월27일 사. 『벗을 위하여 제복숨을 바치는것보다 더큰 사랑은 없다.』(요한13장15절·JOC회원일동).
묘지번호 52, 김점렬. 39년4월10일생. 80년5월22일부상·82년3월l8일사. 『오직 민주를 위해 투쟁하신님이여, 고이 잠드소서.』
5·18희생자 묘역에는 5·18이후 민주화투쟁과정에서 단식·분신·폭행등에 의해 숨진 사람의 무덤도 함께 있다.
『「나는 아직 죽을때가 아닌데…」라는 유언을 남긴채 군부독재의 종말을 보지 못하고 산화한 박렬사, 여기에 누워있다.』 전남대학생회장 박관현군의 묘비. 박군은 광주사태와 관련, 투옥돼 단식투쟁을 하다 82년10월12일 사망했다.
묘지번호 35, 표정두. 87년3월6일 자유민주를위해 미대사관앞분신자살. 『친구야/오월의 화려한계절의 자유도 잠시뿐/오월의 화려한 계절의 해방도 잠시뿐/지금은 모두다 비싼 눈물로 잠들어 버리고/움직이는 것과 움직이지 못하는 것으로 확연히 구분되어/여러천년의 기억속으로 달음질친다.』열사시-힘(力)중에서.
최루탄에 맞아 숨진 연세대 이한열군도 여기 잠들어 있다. 『그대가는가/어딜가는가/그대등뒤에/내리깔린쇠사술/어디가는가/그대 끌려간 그자리위에/4천만 민중의/웃음을 드리우자』-이열사 유고시.
묘지번호 54, 박선영. 66년11월20일생, 87년2월20일사. 분신자살·학생의 일기에서.
『…차라리 죽어/다시 깨어나리라/진정 역사가 원하는 인간이 되기위하여/힘을 길러나오리라.』 87년12욀12일 너를 사랑하는친우 일동.
묘지번호 106. 애국농민 김길호열사.
88년 선거무효화 투쟁중연행당한후 88년3월5일무안경찰의 집단 폭행으로 사망. 『할일이 많은데 할일이 많은데/꺼져가던목소리/귓가에 쟁쟁한데 어이 홀로 떠나는가/그대/못다푼 한/수천 수만민중의 불꽃으로 타올라라.』
신영일. 『청년이여 청년의 모범이여/살아서 민중의 방패/죽어서 민중의 창이되다/홀로는 불꽃으로 숨쉬며/어우러져서는 들불로 타오르다/어둠의 산하를 헤쳐/새벽의 보람찬 세상으로 함께 가고저.』전청련회원 일동, 88년5월9일 숨지다.
광주망월동 5·18묘역은 그들의 엄청난 고난에 비해 너무 초라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16만7천평방m의 시립공원묘지 한모퉁이 제3묘역에 자리잡은 5·18묘역은 전체면적의 1·8%인 3천1백30평방m로 비좁다.
80년 5월18일부터 27일까지 진행된 민주투쟁과정에서 숨진 수많은 희생자중 1백26구가 5월29일 묻히면서 조성됐다.
1년후 5·18과 아무런관계가 없는 일반시민의 묘 3백5기가 들어서 그때부터 1기의 묘도 들어설 여지가 없는 비좁은 묘역으로 변해버렸다. 그후 83∼84년까지 당국의 회유로 순수한 희생자묘 가운데 26기가 고향이나 선산으로 옮겨져 5·18희생자묘는 모두 1백기로 줄었었다. <광주=위성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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