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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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도시는 얼굴을 갖고, 시골은 영혼을 갖는다』고 말한 시인이 있었다. 뉴욕같이 무섭고 징그러운 얼굴을 가진 도시가 영혼을 갖고 있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도시한 가운데 있는 「센트럴 파크」가 바로 그 영혼이다.
이 공원엔 가난한 사람도, 부음도 아침저녁으로 드나들며 산책도 하고, 조깅도 하고, 벤치에 앉아 책도 읽는다. 일요일이면 사이클링을 즐기는 사람들도 많다. 국회의원도, 시장도, 수녀도, 흑인도, 유명한 배우도 어렵지 않게 이 곳에서 만날 수 있다.
8·3평방km면 결코 작지 않은 공간이다. 『뉴욕에 이런 공원이 없었으면 그만한 크기의 정신병원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 아름드리 수목하며, 바윗돌하며, 호수마저 시원해 이 공원은 뉴욕의 숨통을 활짝 열어 주고 있다.
뉴욕이 들어선지 2백년이 지나는 동안, 이 넓은 녹지가 용케도 남아날 수 있었다. 그 도시엔「불도저 시장」도, 고관대작의 친척도 없었다는 말인가. 공원이고 뭐고, 싹 밀어 버리고 아파트를 지으면 금 쪼가리 값으로 누구 돈을 먼저 받아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 아니면 그래 미국엔 선거다운 선거도 한번 없었다는 말인가.
우리 나라는 신통치도 않은 선거를 한번 치를 때마다 애꿎게 수난을 당하는 것이 녹지나 그린벨트다. 그나마 내놓고 화제에 올리는 것은 고마운 일이고, 선거 북새통에 어물뚝딱 없어진 녹지만 해도 부지기수다. 곁으로야 물론 그럴듯한 핑계나 법을 둘러 댔겠지만 속을 파보면 뻔한 노릇 아닌가.
이번 국회의원 선거를 치르고 나서도 기다렸다는 듯이 나오는 소리가 녹지와 그린벨트 깎아 먹는 얘기다. 알량한 선거 한번 있을 때마다 이 핑계, 저 핑계로 녹지는 남아나지 않게 되었다.
말이 좋아 주택난 해소책이지, 그래 언제부터 정부가 그리 알뜰살뜰 녹지 깎아 서민들에게 비둘기 집이라도 지어주었는가. 필경 힘께나 쓰는 누가 뒤에서 귀엣말로 소곤소곤 하지 않고서야 몇 뼘 남지도 않은 녹지를 밀어 버리자는 궁리를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영혼은 고사하고 추악한 얼굴의 서울을 남겨 놓고 후세들에게 풍요로운 세상 만들었다고 장담할 셈인가. 높은 빌딩 몇 개보다 녹지공간 많이 만들어 놓는 나리님이야 말로 그 이름도 길이 남는다는 것을 모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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