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는 시장 맨땅 헤딩 … 박항서 매직은 B급이 만든 특급 태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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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1호 25면

[스포츠 오디세이] 박항서 감독 베트남행 뚫은 이동준 에이전트

이동준 대표는 ’박항서 특수를 빼고 5년간 아시아 국가에 지도자·선수를 중개한 금액만 130억원 정도다. 액수를 밝히는 건 축구 비즈니스를 꿈꾸는 후배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신인섭 기자

이동준 대표는 ’박항서 특수를 빼고 5년간 아시아 국가에 지도자·선수를 중개한 금액만 130억원 정도다. 액수를 밝히는 건 축구 비즈니스를 꿈꾸는 후배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신인섭 기자

베트남을 뒤흔들어 놓은 ‘박항서 신드롬’을 파 보면 한 청년 사업가의 투지와 안목, 땀과 눈물이 나온다. 프로 클럽도 아닌 실업팀(창원시청)을 맡고 있던 박항서(59) 감독을 베트남축구협회에 추천한 에이전트. 우여곡절 끝에 베트남 축구 A대표팀과 23세 이하(U-23) 대표팀 지휘봉을 잡게 해 준 사람이 이동준(33) DJ매니지먼트 대표다. 그는 남들보다 먼저 동남아 축구 시장의 가능성을 봤고, 몸으로 뛰고 진심을 보여주면서 태국·베트남·말레이시아·홍콩 등에 자신의 네트워크를 심었다. 지난해 10월, 300대 1의 경쟁률을 뚫은 박 감독의 베트남행은 이런 흐름 속에서 나온 ‘필연적 기적’이었다.

증권사 근무하며 베트남 시장 눈떠 #주말 중국·홍콩 등 누비며 인맥 넓혀 #K리그 중계권 팔고 쯔엉도 데려와 #박 감독 선임은 300대 1 뚫은 ‘기적’ #베트남축구협 퇴짜에 혼자 운 적도 #K리그 침체는 도전정신 없기 때문 #축구 사업 하려면 어학·배짱 필수

베트남 U-23 대표팀이 아시아축구연맹(AFC) U-23 챔피언십에서 준우승한 뒤 박 감독은 베트남의 국민 영웅이 됐다. 박 감독이 하루종일 환영 행사와 인터뷰·토크쇼 등을 소화하는 동안 이 대표는 밀려드는 행사·광고·인터뷰 요청을 교통정리 하느라 눈코 뜰 새가 없었다. 그는 하노이 크라운 플라자호텔에서 따로 방을 쓰지 않고 박 감독 객실(스위트룸) 한쪽에 간이침대를 놓고 쪽잠을 잤다.

쯔엉 정성으로 돌본 게 베트남에 어필

쯔엉

쯔엉

첫 인터뷰는 1월 31일 이 호텔 로비에서 했다. 온종일 베트남축구협회와 박 감독 일정 관련 회의를 한 이 대표는 밤 9시가 넘어 호텔로 돌아왔다. “이전에 베트남축구협회에 다섯 번 찾아갔는데 다섯 번 모두 퇴짜를 맞고 협회 건물 옆 카페에서 혼자 운 적도 있어요. 지금은 저를 서로 모시려고 안달이네요”라며 그는 웃었다. ‘중학 때까지 태권도 선수-부상으로 운동 중단-성균관대 경영학과 입학-국제축구연맹(FIFA) 에이전트 시험 합격-아침 7시부터 밤 11시까지 극한 알바-졸업 전 스포츠마케팅 회사 설립-미래에셋자산운용 홍보실 근무’까지 개인 이력을 훑었다. 본격적인 얘기를 하기엔 내 비행기(하노이-인천) 시간이 촉박했다. 2차 인터뷰는 한국에 들어가서 하기로 했다. 지난 7일 이 대표가 중앙일보로 왔다.

 어떻게 동남아 축구 시장을 뚫게 됐나요.
미래에셋에서 일할 때 ‘이머징 마켓(신흥시장)’에 관한 리포트를 자주 보면서 중국과 동남아 시장이 커지면 축구도 함께 성장한다는 걸 알게 됐죠. 주중엔 회사 일을 하고 ‘금요일 밤 출발, 월요일 새벽 도착’ 일정으로 중국·태국·홍콩 등을 돌아다녔습니다. 국내 축구판에선 어린 저를 끼워주지 않지만 외국에선 VIP석에 앉혀 주고 축구 구단주·단장 등과 프리 토킹할 기회를 주더군요. 중국 항저우 팀에 트레이너·전지훈련·장비 등을 지원하면서 신뢰를 쌓았고, 2015년 12월 홍명보 감독을 앉히면서 토털 컨설팅을 할 수 있게 됐죠. 뜨는 시장을 보고 맨땅에 헤딩한 게 먹힌 겁니다.
 그게 태국-베트남으로 이어졌군요.
K리그에서 30세만 넘기면 퇴물 취급 당하는 선수들이 많았어요. 관록 있는 미드필더 김태민 선수를 중국 충칭 팀에 보낸 게 시작이었죠. 선수는 현재 연봉의 3배 이상을 받고, 팀에선 기량 좋고 자기관리도 뛰어난 선수를 받으니 윈윈이었죠. 그러다 중국에 특A급 선수들이 들어오는 걸 보고 우리 선수들은 태국·말레이시아 쪽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베트남에 K리그 중계권도 팔았다면서요.
축구는 콘텐트, 축구 경기는 한 편의 재미있는 연극이라고 생각합니다. 축구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동남아 국가에 ‘K리그’라는 상품을 알리고 싶었어요. 결혼자금의 30%인 3만 달러를 털어 K리그 10경기 중계권을 사서 베트남 채널에 틀었습니다. 결과는 참패였죠. 시청률 0.4%가 나왔습니다. 베트남 사람들에게 한국 축구는 재미도 없고, 봐야 할 이유도 없었던 거죠. 세계적으로 유명하거나 친숙한 선수도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베트남 최고 스타인 쯔엉을 K리그에 데려오게 된 거죠.
 박 감독과 베트남의 연결고리가 쯔엉이라고 하던데요.
2016년 쯔엉을 인천 유나이티드에 입단시켰습니다. 그런데 팀 내에서 ‘저 친구 좀 이상하다’는 얘기가 자꾸 흘러나왔어요. 동남아 축구에 대한 무시와 편견, 팀 내 경쟁구도 속의 왕따 같은 걸 많이 당했습니다. 지난해 강원으로 옮긴 뒤에도 경기 뛸 기회를 거의 잡지 못했어요. 그렇지만 끝까지 쯔엉을 지켜주려고 진심을 다했고, 그게 베트남 축구인들에게 소문이 난 모양입니다. 그 덕에 박 감독님을 추천할 수 있었고, 감독님이 기회를 잡으신 거죠.

박항서 감독은 우직한 촌놈 스타일

‘박항서 매직’을 일궈낸 이영진 코치, 박 감독, 배명호 트레이너(왼쪽부터). 하노이=정영재 기자

‘박항서 매직’을 일궈낸 이영진 코치, 박 감독, 배명호 트레이너(왼쪽부터). 하노이=정영재 기자

베트남 U-23 팀에는 ‘K리그 퇴출 4인방’이 있다. 박항서 감독, 이영진 수석코치, 배명호 피지컬 트레이너, 주장 쯔엉이다. 모두 이 대표의 클라이언트(고객)다. 박 감독은 경남·전남·상주 등 K리그 팀들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도 매번 ‘외풍’에 밀려났다. 이 코치도 대구 FC 감독을 맡았다가 지휘봉을 내려놨다. 배 트레이너도 K리그를 떠난 뒤 한동안 자리를 잡지 못했다. 하노이에서 박 감독을 만나 ‘사람들이 감독님을 B급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고 질문하자 “난 B급이잖아”라며 허허 웃었다.

 이 대표도 에이전트로서 B급이었나요.
솔직히 한국에서는 B급이었어요. 하지만 아시아에서는 A급입니다. 감독님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겠네요. ‘박항서 신드롬’은 B급이 일으킨 특급 태풍이라고 불러도 좋겠습니다. 저는 선배들이 안 하는 쪽을 뚫고자 했고, 몸으로 뛰고 발품을 팔면서 이 시장의 잠재력을 본 거죠. 앞으로도 국내에서 B급으로 취급되는 지도자·선수를 아시아 시장으로 데리고 나와 A급으로 만들어 주고 싶습니다.
 한국인 지도자끼리 호흡이 잘 맞죠.
세 분 모두 AFC 지도자 P(최상급) 라이선스를 갖고 계신데, P급 3명이 만들어 내는 케미는 놀랍습니다. 경험이 많다 보니 여유가 있어요. 그걸 선수들이 압니다. 처음 가 보는 길이라 ‘안될 것 같다’ 싶다가도 저분들을 보면 ‘될 것 같다’로 생각이 바뀐다고 쯔엉이 말하더군요. 90분짜리 경기 영상을 밤새 편집해 15분짜리 키 포인트 레슨 교재로 만드는 게 P급 지도자의 능력이죠.
 가까이서 본 박 감독은 어떤 분입니까.
떴을 때 으스대지 않고, 자신이 힘들 때 말 한마디라도 따뜻하게 해준 사람을 꼭 챙깁니다. 원칙을 지키고, 이상하게 꺾고 꼬는 법이 없어요. 줄 거 주고, 받을 거 받고, 낼 거 내고…. 진짜 우직한 촌놈 스타일이죠. 하하.
 세계 축구 시장이 후끈 달아올랐는데 한국만 침체기입니다. 곧 바닥을 찍고 반등할 거라고 기대하는 축구인들이 많은데요.
옆 나라가 잘 된다고 우리도 잘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심각한 오류죠. 프로축구를 운영하는 사람들의 인식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신입사원이 마케팅 기획안 올리면 과장·부장이 ‘이거 내가 2004년에 해 본 거야. 안 되거든’ 하면서 묵살합니다. 왜 안 됐는지 돌아보지도 않고 젊은이에게 기회를 주지도 않아요. K리그가 지나치게 젊은 감독 위주로 가는 것도 위험합니다. 젊은 셰프가 맛있는 요리를 할 수 있죠. 그렇다고 나이 든 셰프가 맛없는 요리를 하는 건 아니잖아요. 한국은 팀과 지도자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너무 쉽게 경질하고 실패에 대한 부담과 두려움을 줘요. 재미있고 도전적인 축구를 못 하는 거죠.

이 대표는 “돈은 좀 벌었어요”라고 솔직히 말했다. “2013년 첫 거래 이후 지금까지 아시아 팀에 지도자·선수를 중개한 액수만 130억원 가까이 됩니다. 부동산 중개인처럼 양쪽에서 수수료를 받죠. 앞으로 시장을 더 확대하고, 다문화 가정의 축구 유망주를 지원하는 사업을 해 보고 싶어요.”

축구 비즈니스를 꿈꾸는 후배를 위한 조언을 부탁했다. “절대 축구 관련 일부터 시작하지 마세요. 생각의 회로가 축구 쪽으로 굳어지면 안 되니까요. 홍보와 마케팅, 어학과 국제 매너도 익혀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버틸 수 있는 정신도 중요하죠. 속상하고 짜증나고 무시당하는 일? 지나고 나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정영재 스포츠선임기자
jerr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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