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천지 건너 우리땅이 손에 잡힐 듯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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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목단강시의 처체(이주옥·조문화부부) 짐에 숙소를 정하고 나서 며칠간 시내를 구경하고또 처남집들을 방문, 환담하며 4O여년만에 형제의 우애를 다시 만끽했다.
8월2일 고산지방 기후에 맞춘 백두산 여행을 위해 오전 9시10분 목단강역을 떠나 남으로 한중국경의 도시「투먼」(도문)으로 향했다.
보통객차의 「란줘처」(연좌차·특실차간)에 자리를 잡고 앉으니 먼저 눈에 띄는 것이는 철도기관의 열차라고 설명했다.
좀 있다가 먼저 우리말로 『손님·여러분, 이 열차는 9시 10분에 목단강을 떠나 도문으로 향하는 보통객차입니다.……』에 이어 같은 내용의 중국(한)어 차내방송이 나왔다.
이윽고 열차가 출발하니 상백하청의 「푸우웬」(복무원) 제복을 입은 2명의 젊은 여자승무원이 우리 좌석으로 와 다수를 따라주고 검표를 하고 돌아갔다.
이들은 30대 초반인데 한 승무원의 팔에는 「열거장」이란 홍색문자의 완장이 걸쳐있었다.
점심때 보니 이들은 김치반찬으로 점심을 먹으면서 명탕한 함경도 사투리의 어조로 잘들 지껄인다.
알고보니 이들은 다 철로원으로 복무하는 우리 교포 여성들이라 한다.
말쑥한 제복을 입고 횐 얼굴에 친절하던 이들의 모습은 이번 여행 중 잊을수 없는 하나의 인상이었다.

< 한국가요 즐기는 듯 >
목단강 역을 뗘난 열차는 시원한 목단강 철교를 건너고 「닝안」(영안) 을 통과하여 2시간만에 「뚱징청」(동경성)역에 도착했다.
이곳은 후 고구려를 건국하려던 발해왕국(초대 대조영장군)의 동부 고지인데 지금은 석등을 비롯한 몇가지 석조 유구가 전한다고 동서 조의사는 말했다.
잠시 착잡한 민족 심정이 머리를 스쳐갔다.
좀 있다가 차내 방송에서 음악이 나오니 이를 듣던 안사람은 바로 자기 동생 이주일(유명한 음악가로 근년 하르빈에서 교통사고로 별세)이 작곡한 『어머님 환갑잔치의 노래』라고 반가와하면서 설명했다.
열차는 오후 4시20분 한중국경 도시요 두만강변의 도문(인구 약10만명·교포 약6만명)역에 도착했다(8월7일 귀로에 다시 이곳에 와서 두만강, 철교 앞으로 나가 다리건너 남양읍과 고국산천을 보면서 감회에 젖기도 했다).
우리는 택시를 타고 연길시로 달렸다.
타고 보니 이 운전기사도 교포 청년인데, 그가 우리를 위해 들러준 녹음 테이프의 노래는 주현미양의 『비내리는 영동교』였다.

< 45년전 옛 친구 만나 >
북쪽의 외국땅에 와서 우리나라 노래를 맘대로 들을 수 있는 환경을 생각하니 감개무량했다.
「하이란강」(해난강)을 왼편으로 끼고 우리 동포가 많이 사는 연변 조선족 자치주(전의 배간도)의 중심지 「옌지」(연길)시가 나타났다.
연길시에 도착, 안사람의 학생시절 친구인 서순옥씨 부부(남편은 연길흉료 의원원장 박만석씨)안내로 연길 민족반점 (연길민족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안사람과 서여사와의 45년만의 해후는 일막의 드라마였다.
연길시(배간도 시대는 국자가라 불렀다)는 인구 약 20만명으로 우리 동포가 약 6만명이며 연변대학·연변 의료대학 등이 있는데 이들 대학에서는 우리말로 강의한다고 한다.
연길시에 사흘 있는 동안 이곳저곳 우리 동포들의 생활상을 둘러보고 사람들도 만나 환담했다.
하루는 연변대학 미술료와 연변 미술협회에 관계한다는 김영호·정동수 양씨의 예방을 받고(재미교포 김형오씨의 소개로) 환담했는데, 이들은 특히 내가 전해준 조선조와 근대 우리나라 화가들의 작품사진을 받고 민족미술의 경향을 알겠다고 매우 기뻐했다.

< 비룡폭 또 봐도 장관 >
8월5일 드디어 「참바이산」(장백산·중국인이 부르는 중국측의 백두산 이름)등정의 장도에 올랐다.
우리가 타고 갈 대형차는 동행하는 연변신문사 편집과장 김덕률씨가 알선해 준비한 일제의 Toyada Land Cruiser, 즉 튼튼한 등산용 승용차였다.
운전기사도 물론 우리교포 청년으로 백두산 등산에 익숙했다.
우리는 이른 아침 연길시를 떠난지 얼마 안되어 전배 간도지방의 중심지였던 용정시(인구 6만명·교포 약4만명)를 지나갔다.
가로수가 울창한 시원한 길을 달리는데 도로 연변의 많은 농가에는 우리 동포도 많이 살고 있는데 그 모습이 초라해 잠시 일제시대 남부여대하여 이곳으로 이민해온 이들(2,3세)의 조상시대가 연상되어 마음이 착잡했다.
도중 「안투센」(안도현) 「완바요쩐」(만보진)의 교포가 경영하는 광명식당에서 개탕(보신탕)으로 점심을 먹고 「쑹걍」(송강) 「얼다오」(일견)를 지나 연길시를 떠난지 6시간만에 7백리 길을 주파, 장백산 경내에 들어섰다.
원시림의 정글 길 앞 저멀리 천지에서 흘러내리는 청지백색의 장엄한「페이룽푸」(비룡폭)의 광경이 점점 다가온다.
우리는 외백지장에 여장을 풀고 쉴새도 없이 고대했던 천지를 향해 높고 험난한 산비탈 길을 올라 2천6백미91m 위의 천지에 올랐다.
이 감격을 어찌 다 표현하랴-.
그러나 불행히도 흐렸던 날씨는 안개를 몰고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나는 오직 저 천지(넓이8백11평방m) 건너 안개속에 솟아있는 우리땅 촉의 봉우리들을 보고 사진만 찍은 후 일단 숙소로 내려왔다.

< 계곡마다 온천수 >
깊은 장백산장에서 하룻밤을 자고나니 날씨가 청명해졌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다시 천지에 올랐다.
꿈에만 그리던 이민족의 영산 백두산 천지에 서니 가슴이뛰고 스케치·사진·녹음하느라 손길이 너무 바쁘다.
안사람이 도와준다.
아, 잊을수 없던 이때의 장엄한 인상이여! 산장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저 유명한 비룡폭을 향해 많은 관광객 틈에 끼어 흐르는 물소리 요란한 계곡길을 오르며 김이 무럭무럭 나는 온천수에 손을 씻고 비룡폭 앞에 이르렀다.
힘차게 내리찧는 두줄기의 물소리가 귀를 멍멍하게 한다.
스케치 하느라, 사진 찍느라, 또 물소리를 녹음하느라 참으로 바빴다.
그러나 이 아름답고도 멋진 장관을 화면에 옮길 때 뛰는 가슴 소리는 기쁨의 고동이다.
천지에서 흘러내리는 폭포수는 목단강·송화강·흑룡강 (중소국경)을 자나 동해로 들어간다고 한다.
저녁이 되어 장백산 초대소(여관)식당에서 백석산 특산의 야채를 안주로 마시는 술맛도 좋았고, 옆자리에서 흥겹게 노래하고 춤추는 우리 교포들의 소리 또한 즐거웠다.
잊을수 없는 백두산의 밤은 깊어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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