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낙락한「신정치 1번지」강남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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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허름한 구제품외투에다 중절모를 벗어 쥔 사내가 손나팔을 만들어 쉬어빠진 목소리를 토해낸다. 『친애하는 유권자 여러분, 이 사람을 국회로 보냅시다! 기호는 ×번, 작대기는 ×개, 이사람 ×××를 국회로 보냅시다!』소달구지를 에워싼 선거운동원들의 얼굴엔 피로와 배고픔의 표정이 역력하다.
이것은 보릿고개로 허덕이던 저 50년대, 도시변두리 가난한 출마자의 선거유세 풍속이다.
지금은 달라졌다. 달라져도 많이 달라졌다. 특히신정치1번지로 뗘오르기 시작한 부자동네 강남을구의 유세장 풍속은 그 시절과 천양지차다.
유권자들 입맛에 맞도록 잘 선택된 휴일의 청명한날씨, 따끈한 봄햇살, 널찍한 국민학교운동장 담벽너머로 번듯번듯 훤하게 쭉쭉 빠진 고층아파트들이 줄줄이 서있다. 그 우람한 현대식 시멘트기둥들 사이사이로 번쩍번쩍 금속성 햇살을 튕겨내는 고급 승용차들이 즐비하다. 뿐만아니라 유권자 자신들의 겉모습부터가 옛과 다르다.
헌데 일견이 조용하고 여유낙락한 함구(함구)들이지난해 6·29전후의 저 시청앞·명동·신촌의 거리거리에서, 어찌하여 그토록 거센 분노의 함성을 내질렀으며 이윽고 철벽같던 저구정권의 의지를 삽시간에 뒤바뀌게 했던지가 오히려 이상스레 여겨질 정도다.
각설…후보자의 면면을 살펴볼 차례다. 제비뽑기끝에 1번타자로 단상에 오른 이는 지난 선거때 고배를 마섰던 이태섭후보다. 여당후보로서는 서울서 유일하게 낙선한 전직장관출신의 이후보에게는 이번이 일대 역습의 기회라 그 기세가 결코 만만치않다. 양금씨를 도마위에 올려놓고 야당비판의 포문을 터뜨리자 관중석 여기저기서 터져나오는 박수갈채가 자못드높다. MIT공학박사학위를 가진 이후보에겐 남다른 이점들이 있어보인다. 그가 낙선자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선거유세때의 공약들을 실천해 옮겼다는게 그하나고, 나머지가 여당후보 일반에게 주어지게마련인 조직력의 우세일 것이다.
운동원들이 줄줄이 친절을 베풀고 섰는 유세장 정문에서부터 그 조직력의 우위가 단번에 드러나며 그의 연설 중간중간 엿싸!엿싸!이태섭!을 연발하는적잖은 수효의 청년당원동원능력이 그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한가지 덧붙이자면 그의연설이 끝나자마자 유세장을 빠져나가는 무리들이 눈에 걸렸다고나 할까. 모종의 임무(?)를 완수하고 난뒤 여지없이 떠난다는, 김빼기작전의 일종인 모양인데 그것이 결코 뚝심있고성실한 선비풍인 이후보발상이 아니었기 바란건 비단 필자 한사람이 아니었으리라.
다음으로 단상에 오른 사람은 김용덕후보(우리정의당)와 박춘응후보(신공화당)다. 1번타자에 비해 다소 열기가 식은 분위기때문인지 그들 두 연사의 유세는 다소 맥이 빠져있고 청중에의 설득력 역시 처진다고나 할까. 명분이 분명치 않은 전쟁에 뛰어들었다고 청중들이 판단한 것일까?
냉냉하게 가라앉았던 장내의 열기가 되살아나는건 야권통합서명파의원 홍사덕후보가 단상에 오른때다. 이때 이미 많은 청중들이 장내를 메운다. 그전까지 꼭꼭 닫혀있던 고층아파트 창문들이 열리기 시작한것도 그의 등장이후부터다. 여당후보의 동원능력을 앞지르는, 자발적인 청중동원능력이라고나 할까. 양금씨에의 변호로 시작된 그의 유세는 차츰 양금에의 은근한원망으로 변하면서 현정치상황에 대한 질타로 이어지는데 칭중의 반응이 갑자기 진지해지고 호응도가 열렬해지는것은 곧 그만큼 야당통합에의 바람이 절실했다고나 할까.
결코 능변이 아닌, 뚝뚝분지러지듯한 그의 말솜씨는 양금의 한 사람을 닯았고『의로운 정치인』『명예를 지키는 큰 정치』를 강조하는 대목 역시 양금한쪽과 비슷한 느낌이다. 특기할만한것이 있다. 그의 선전용 팸플릿에 쓰여진「리처드·바크」의 경구가 그것이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볼수있다』그래선지 어깨선지 정문에 늘어선 당원들 입에서도 『21세기의 대통령 홍사덕』이 거침없다.
민주당 민창기후보 역시홍후보 못지않게 지명도가 높은 편이다. 그가 등단하자 청중의 환호가 예사롭지 않다. 크지않은 키에 부드러운 저음의 민후보는 방송인 출신답게 아예 마이크를 뽑아쥐고 연설을 시작한다. 마이크성질을 잘 아는지라 마이크를 요리하겠다는 자신감의 표현에 다름아니다. 그의 성량도 호흡도 타의 추종을 불허할만큼 탁월하고 청증의 감정적 물결을 이내 감지한 그의 태도는 당당하기 그지없다.
특히 라이벌인 홍후보와이후보를 의식한듯 이후보를『신정정초엔 벌벌떨며 고위층에 세배하던 사람』으로, 홍후보를『이집 저집 다니다 떨러난 기회주의자』로 여지없이 매도하는데 이때의 두 피의자(?) 반응이 자못 흥미롭다. 이후보는 연신 범긋범긋 두손을 번쩍 들어 박수를 치는 시늉이고, 홍후보역시 붉게 상기된 열굴로 연방 고개를 끄덕여 청중의 은근한 동조(?)를 구하고있다.
마지막으로 평민당 박명서후보가 등단했을땐 청중들이 많이 빠져나간 뒤다. 가장 우렁차게, 가장 격렬한 음성으로 유세에 응하나 그의 연설은 설득력을 얻지 못하는것 같다. 유감스럽게 좀 구투라고 할까.
막상 진풍경은 모든 유세가 끝나고나서다. 후보들에게 선관위원장이 다가가 노고를 치하하자 한 후보의 힐난이 쏟아진다.
『청중이 이게 뭐요? 이래갖고 연설이 되겠소?』물론 이건 마지막에 등장해서 손해를 본 박후보의 불평이다. 『다음부턴 인신공격하지말기로 합시다』『그래요. 잘 돼가다가 그만. 낄낄낄…』그리고 그들은 언제 그랬느냐는듯 서로의 어깨를 툭툭치고 악수로 웃음을 나누면서 유유히 유세장을 빠져나간다. 아무튼 이정도면 그래도 제법 신정치1번지답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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