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 블랙리스트' 파동, 검찰 손에 좌우될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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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깃발 이미지 [중앙포토]

검찰 깃발 이미지 [중앙포토]

대법원 추가조사위원회(위원장 민중기 부장판사)가 ‘사법부 블랙리스트(판사 뒷조사 문건 의혹)’의 조사 결과를 발표한 뒤 검찰의 움직임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전·현직 대법원장 고발 수사 공공형사부로 #아직까진 사법부 '내부 수습'에 무게 #추가조사위 분석쓰인 '복제본' 파기 논란

문제의 법원행정처 PC에선 양승태(70) 전 대법원장 시절 특정 판사나 진보 판사 모임을 겨냥한 부적절한 동향 파악이 이뤄졌다는 문건이 드러났지만, 검찰은 아직까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본격적인 수사 착수 상태는 아니며 향후 관련 사건의 진행 추이를 지켜보면서 수사 진행 여부를 검토할 예정이다(24일 검찰 관계자)”는 입장이다.

블랙리스트 사태와 관련, 지난해 한 시민단체는 양 전 대법원장을 직권남용 혐의로, 주광덕 자유한국당 의원은 김명수 대법원장을 비밀침해 혐의 등으로 고발했다. 이 사건은 각각 서울중앙지검 형사1부, 공공형사수사부에 배당됐지만 검찰은 이날 양 전 대법원장 고발 사건도 공공형사수사부로 재배당했다. 앞서 검찰은 주 의원의 고발 사건도 통상의 형사부가 아닌 공공형사수사부로 배당했다. 형사부를 지휘하는 윤대진 서울중앙지검 1차장검사의 부인 최은주 서울가정법원 부장판사가 추가조사위원이었던 점을 감안한 결과로 풀이된다.

법조계 안팎에선 법조 삼륜(法曹三輪ㆍ법원, 검찰, 변호사)의 양대 축인 법원과 검찰의 ‘특수 관계’를 고려하면 검찰이 강제 수사에 나서기는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이번 주 안으로 조사 결과에 대한 입장을 밝히겠다는 입장이다. 일단은 사법부 ‘자체 수습’에 무게가 실린다.

하지만 일각에선 검찰이 사법부와 ‘교통정리’를 한 뒤 수사에 나설 수도 있다는 관측이 조심스레 제기된다.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썼던 PC가 미개봉된 상태인 데다, 나머지 3대 PC에서도 비밀번호가 걸린 파일이 다수 남아 있는 상황이라 일부 판사들 사이에서도 “검찰의 수사가 필요한 것 아니냐”는 의견이 나온다. 검찰로선 이미 고발된 사건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방향을 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만약 수사에 나설 상황이 온다면 검찰은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아 ‘임의제출’ 형식으로 문제의 PC 원본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강제 수사권이 없는 추가조사위와 달리 검찰은 작성 시기나 암호 유무와 관계없이 PC 문건 전체를 들여다볼 수 있고, ‘양승태 코트’의 사법행정라인에 있던 관련자 소환 절차 등도 밟을 수 있다.

지난 2017년 10월 25일 취임기념 간담회에 참석하고 있는 김명수 대법원장. 김경록 기자

지난 2017년 10월 25일 취임기념 간담회에 참석하고 있는 김명수 대법원장. 김경록 기자

하지만 현직 김 대법원장에 대한 비밀침해 혐의는 검찰 입장에서도 신중히 접근할 가능성이 높다. 비밀침해죄를 따질 경우 단순히 당사자의 동의 없이 PC를 개봉했는지 여부 외에도 추가조사위의 조사 방식에 대한 수사도 이뤄져야 한다.

추가조사위는 앞서 법원행정처 PC 3대의 하드디스크를 복제하는 방식으로 분석을 진행했다. 분석이 끝난 뒤 해당 복제본을 디가우징(degaussingㆍ자기장을 이용해 복구할 수 없도록 삭제하는 기술)으로 파기했다. 원본 PC는 남아 있지만 조사 분석에 쓰인 복제본은 초기화된 상태다.

이 때문에 추가조사위가 어떤 키워드로 검색했고, 열어본 문건은 무엇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어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추가조사위는 22일 2011년 11월~2017년 4월 작성된 문건들이 조사 대상이었고 ‘성향’ ‘동향’ 등 단어와 국제인권법연구회 소속 판사의 이름 등을 키워드로 문건 검색을 했다고 밝혔다. 만약 검찰 수사가 진행된다면 수사 대상에 포함될 수 있는 내용들이다.

한 서울고법 판사는 “조사 당시 실수로라도 PC 사용자의 사적인 정보, 문건 등에 대한 조회가 이뤄진 일이 없는지 투명하게 근거를 남길 필요가 있었다. 조사에 쓰인 복제본을 디가우징한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추가조사위 관계자는 “초기 법원행정처 측에서 이미징(복사)된 저장매체가 재차 이미징 돼 외부로 유출될 우려를 제기했다. 행정처에서 인도한 원본 이외의 복사본은 모두 초기화하기로 조사 초기 법원행정처와 합의한 것”이라고 전했다. 추가조사위 측은 또 “조사 당시 투명한 조사를 위해 당사자들에게 조사 참여와 참관 등을 제의했지만 모두 동의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법원행정처 일각에선 “복사본 폐기와 관련해 합의한 적이 없다”는 주장도 나와 앞으로 진실 게임 양상으로 번질 가능성도 있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이날 출근길에서 기자들과 만나 “(대법관 입장 표명 관련) 따로 말씀드릴 기회가 있을 것이다. 사안 전체를 종합해 빠른 시일 내에 말씀드리겠다”고 말했다.

손국희 기자 9ke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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