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반 의견 갈려 진통 끝에 난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이번 상습 땅 투기꾼의 명단 발표는 당초 약속일인 구정(2월 l8일) 시한을 달포나 넘기며 이루어진 난산이었다.
국세청은 그 동안 명단 공개 여부를 놓고 내부적으로도 의견이 엇갈려 상당한 진통을 겪었다.
비록 국세청장이 부동산 투기를 뿌리 뽑기 위해 상습 투기꾼들의 명단 공개를 일단 「선언」하기는 했지만 꼭 명단 공개라는 극약 처방을 써야 하느냐에 고심이 많았다는 얘기다.
국세청은 공개 반대 의견이 크게 대두되자 은밀히 여론조사를 실시하기도 했는데 각계 각층의 의견을 종합한 결과 공개 쪽으로 방침이 확정됐다는 후문이다.
여론조사 결과 중·상류이상의 지식인층에서는 『투기행위 자체가 괘씸하기는 하지만 탈세 부분에 대한 세금 추징선에서 그치면 됐지 꼭 여론재판을 받게 해야겠느냐』는 의견이 많았으나 봉급생활자 등 대부분의 근로소득층은 『당장 명단을 공개하라』는 강경 의견이 지배적이었다는 것.
국세청은 한때 청내 여론에 밀려 투기꾼의 명단 공개를 보류하고 탈루 세액에 대한 추징선으로 당초 방침을 후퇴하기도 했었다.
사회적「매장」이나 다름없는 명단 공개를 피해 가고자 했던 .것이다. 또 국세청의 조사가 전국적으로 일제히 시작되자 극성을 떨던 투기 붐이 꼬리를 감춘 것도 국세청의 강경 방침을 한때나마 후퇴시킨 동기도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세청이 다시 당초 약속대로 강경으로 선회한데는 이번에 강력 대응을 하지 않을 경우 앞으로 또다시 부동산 투기 붐이 재연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점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국세청의 입장에선 또 대 국민약속을 이행치 않게 되면 국민들의 정부에 대한 불신풍조가 만연, 사회전반에 걸쳐 훨씬 큰 부작용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한 것이다.
국세청 당국자는 이번 투기조사 과정과 발표 결과에 대해『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을 정도로 공정한 조사를 했다』고 밝히고 있다.
「공정조사」를 누누이 강조하는 까닭은 그 동안 증시 등에『재벌기업과 유명인사가 다수 포함돼 있다』는 루머 때문.
공교롭게도 명단 공개 자 39명 가운데는 대기업은 물론 단 한 명의 유명인사도 포함돼 있지 않아 국민들이 이를 믿어 줄지를 염려하고 있다.
가뜩이나 최근 새마을운동 본부 비리 사건으로 정경유착에 대한 국민들의 눈총이 냉랭한데 『대어는 다 빠져나가고 송사리만 잡았다』는 힐난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고 있는 것이다.
국세청은 이번 명단 공개자들 중 일부라도 명예 훼손 등을 들어 소송을 걸어 올 경우에도 대비했다고.
국세청은 만의 하나라도 소송을 제기해 올 경우 공익을 위한 프라이버시 침해는 명예 훼손이 성립치 않는다는 조항을 들고 있다.
또 공개 대상자 선정의 기준에 탈세 행위를 포함, 조세범 처벌법 위반 혐의자들을 추렸기 때문에 별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다.
국세청은 명단 공개대상자 숫자를 놓고도 심한 진통을 겪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투기 혐의자 6백 96명중 당초에는 2백 명 선을 공개하려 했다가『너무 많다』는 의견에 밀려 1백 명 선으로 깎였다가 마지막 단계에서 39명으로 줄었다는 것.
이번에 명단이 공개된 투기꾼들을 유형별로 보면 ▲투기를 하면서 조세범 처벌법 위반 혐의자가 8명▲기업자금을 변칙적으로 유용, 투기한 자가 2명▲국토이용 관리법을 위반한 자가 19명▲부동산 중개업 법 위반자가 7명▲3억 원 이상의 고액 탈세자가 3명으로 나타났다.
구체적 사례로는 기업수입 금액 26억 원을 누락시켜 자녀 명의로 개발 예정지역의 땅 10여만 평을 사들여 법인세·증여세 등 44억 원을 탈세한 경우도 있으며, 국세청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본인 및 가족의 주소지를 21차례나 옮긴 경우도 있다. <이춘성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