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환, 새마을 7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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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80년대 전경환씨의 「새마을」은 「마법의 주문」이었다.
전씨의 이름과 새마을을 갖다 붙이면 그것이 무엇이든 안 되는 일이 없었다.
법도 제도도 돈도 사람도 전씨의 「새마을」은 마음만 먹으면 멋대로 고치고 어디서나 끌어다 마구잡이로 거의 제약 없이 쓸 수가 있었다.
새마을사업에 국비· 지방비지원, 국· 공유지 무상대부, 성금모금, 인력차출등을 할 수 있게한 「새마을운동조직육성법」이 그것을 뒷받침했다.
전씨가 「협조」를 요청하면 국비· 지방비가 다투어 돌려졌고 민간의 성금· 성품이 줄을 이었으며 은행은 특별융자를 할당했고 때론 그린벨트 규제조차 슬그머니 풀렸다.
전씨는 「새마을」을 마치 「금 나와라 뚝딱, 은 나와라 뚝딱」 도깨비방망이처럼 휘두르며 지난 7년간 전국을 무대로 신바람 나게 「새마을」 놀이를 벌였다.
그리하여 소박한 이상주의 지식인들의 자기희생에서 싹텄던 국민정신운동 「새마을」은 어느새 정부안의정부, 거대한 권력기구로 변모하기에 이르렀다.
전씨는 81년1월 사무총장에 취임하자마자 엄청난 「의욕」으로 「새마을계(?)를 통일」 하는 영토확장에 나섰다.
발족당시 새마을본부는 본부와 2개 연수원· 4개 산하단체를 거느리고 있었다.
전씨는 새마을홍보업무 단일화를 내세워 81년5월 그때까지 대한공론사가 발행하던 『월간새마을』을 본부로 가져와 버렸다. 월13만부씩 발행되는 이 잡지는 전액 문공부가 예산으로 사다 전국의 새마을지도자· 기관· 직장등에 배포하도록 했다.
87년까지 그렇게 해서 새마을본부에 지원된 국민세금· 국비가 90억2천8백70만원.
이어 7월에는 전직언론인 위상욱씨가 72년 창간, 발행해오던 『주간 새마을』운영권을 넘겨받았다. 그러나 전씨는 이 신문사는 주식회사 체제로 만들어 자신의 사기업으로 경영했다. 구독은 전국 시· 도의 지방비예산. 87년까지 90억2천8백70만원 국민세금이 전씨의 개인회사인 새마을신문사로 들어갔다.
全씨는 「새마을」자가 붙은 것은 모두 본부 산하로 통폐합해나갔다.
새마을문고중앙회· 새마을청소년중앙연합회· 새마을조기축구회· 새마을금고연합회 등 4개 단체가 차례차례 산하로 흡수됐다.
이와함께 지방조직도 확대됐다.
본부산하에 시· 도마다 15개지부· 2백41개 지회가 설치됐고 산하단체별로 또 전국조직이 별도로 형성돼 시· 도마다 「새마을」관계 지부· 지회가 1백27개, 시· 군· 구지회 또는 연합회가 1천6백4O여개, 읍· 면· 동 협의회 또는 분회가 자그마치 1만1천6백여개나된다. 산하회원은 87년말 현재 명부상 전국민의 5분의1에 해당하는 8백91만명.
이밖에 장성· 영종도에 차례로 연수원이 신설돼 본부직할연수원만 4개로 늘어났고 공장 새마을연수원등 산하단체가 운영하는 지정연수기관이 11개여서 새마을관계연수기관만 전국에 15개를 헤아렸다.
중앙본부의 자산도 81년말 60여억원이던 것이 5년만인 86년말엔 2백19억원에 이르렀다.
「의욕과 체력」이 보통인을 월등히 뛰어넘는 전씨는 새마을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 「새마을」방망이를 휘둘러 새마을과는 전혀 다른 자기사업도 쉴새없이 벌였다.
새마을연수단을 이끌고 대만에 갔다가 국민당의 「반공구국청년단」수련시설과 교육과정을 보고 감명을 받은 전씨는 귀국하자 새마을기금을 빼내 「지도자육성재단」을 따로 설립, 영종도 대규모연수시설개발에 착수했다. 올림픽에 대비해 교통관광업계에 새마을이념을 보급한다며 또 다른 개인기업으로 『교통관광신문』사를 차렸다.
남달리 스포츠를 좋아하는 전씨는 사무총장부임직후 자신이 경호실 근무시절 참여했던 궁정동조기축구회를 불러다 친선축구시합을 시발로 전국을 돌며 축구시합을 벌이다 본부안에 체육국을 신설했고 다시 「사회체육진흥회」를 별도로 설립, 자신이 이사장을 맡았으며 월간잡지 『사회체육』사를 따로 차려 경영했다.
이렇게 해서 한창때 전씨의 공식직함은 자그마치 25개. 그는 과연 무엇을 위해 이토록 의욕적인 활동을 벌였을까.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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