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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진국 칼럼

‘빠’, 상대 실수로 장사하는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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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김진국
김진국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김진국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김진국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선거가 다가오면 판세 분석이 만발한다. 내년 6월 지방선거다. 연말 모임에서 좋은 안줏거리다. 제3당의 향방이 정리되면 설날쯤에는 더 신이 나서 떠들 소재다.

‘빠’는 어려울 때 힘이 되지만 #잘나갈 때는 ‘독’이 된다 #누가 더 잘하느냐가 아니라 #누가 실수를 덜 하는지 경쟁 #사랑과 용서 대신 증오와 보복 #잠시라도 반성 기회 가졌으면

한국 정치를 분석할 때 중심축은 무엇일까. 역시 지역감정이다. 누구도 다루기 어렵다. 조심스럽게 접근하지 않으면 말썽이 난다. 그렇지만 어떤 정책이나 이념보다 강력한 영향력을 가졌다. 이념이나 정책은 그다음에나 논할 거리다.

정책선거가 돼야 한다고 말한다. 정책보도가 부족하다는 지적도 많이 한다. 하지만 빛 좋은 개살구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꼭 있어야 하지만 그리 큰 영향을 못 주는 장식물 취급을 받는다. 복지 확대를 꺼내면 좌파라고 공격한다. 그렇지만 같은 정책이라도 박근혜 후보가 제안하면 괜찮다. 더구나 투표만 끝나면 잊어버리는 ‘공약(空約)’이 되기 일쑤다.

지역구도를 따지면 예측이 가능한가. ‘글쎄요’다. 1987년 13대 대통령선거 때 김대중(DJ) 후보는 ‘4자 필승론’을 믿었다. 철저하게 지역구도를 고려한 현실적 분석이다. 경상도 표를 노태우·김영삼 후보가 나눠 가지고, 충청도 표를 김종필(JP) 후보가 가져가면 호남 표만 모아도 당선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결과는 3등이었다.

그로부터 10년 뒤. 15대 대통령선거 때는 유시민 작가가 『97 대선 게임의 법칙』이란 책을 냈다. 지역주의 때문에 김대중 후보는 당선될 수 없다는 논리다. 하지만 이 ‘법칙’은 깨졌다.

전략보다 중요한 변수가 있다는 말이다. 3당 합당, DJP연합 같은 기상천외의 정치 연대도 있고, 탄핵이나 측근 비리 같은 내부 요인, 외환위기 같은 외부 변수도 있다. 그렇지만 어느 선거를 막론하고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자살골’이다. 자기가 잘해서가 아니라 상대 실수로 표를 얻는 경우가 더 많았다는 말이다.

‘87년 체제’의 첫 번째 13대 대통령선거에서 노태우 후보를 당선시킨 것은 누가 뭐래도 양 김(김영삼·김대중)의 자책골이다. 97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된 힘은 DJP연합이라는 묘수다. 하지만 이회창·이인제 후보의 표 분산을 빼놓고는 답이 안 나온다.

김진국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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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최대 표 차로 끝난 2007년 대선에서도 열린우리당이 스스로 무너졌다. 노무현 정부 지지도가 임기 말 20%대로 주저앉았다. 한때 10%대까지 떨어졌다. ‘개나 소나 야당이면 당선’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올해 대선도 마찬가지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여론의 몰매를 맞아 보수진영은 일찌감치 포기해 버린 선거였다.

2004년 17대 총선도 ‘누가 누가 잘못하나’를 경쟁했다. 한나라당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과 수백억원의 대선자금 ‘차떼기’, 열린우리당은 정동영 의장의 ‘노인 폄하 발언’이 최대 쟁점이었다. 지난해 20대 총선은 친박(박근혜)-비박의 갈등과 ‘옥새 파동’이 새누리당에 타격을 줬다.

‘빠’는 배타적이다. 어려울 때는 힘이다. 하지만 잘나갈 때는 독(毒)이다. 박사모는 이명박 정부가 친박을 공천에서 배제할 때 ‘친박연대’ 등을 살려 낸 공신이다. 3김 이후 유일하게 절대 지지층을 가진 정치인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하지만 ‘박빠’가 박근혜 정부를 망쳤다. 비판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 정화 능력을 파괴했다.

박 전 대통령이 탄핵까지 가지 않을 수도 있었다. 민심이 기대하는 이상으로 던지라는 조언이 없었던 게 아니다. 하지만 ‘박빠’가 묻어 버렸다. 탄핵 심판 국면에서도 태극기를 흔들며 합리화하려 했다. 당연한 일이다. ‘빠’에 전략이 있을 수 없다. 그걸 바라보는 정치인의 그릇 탓이다. 10년이 지나도 뒤집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제 ‘문빠’가 기세다. 어떤 친문 논평가는 속된 표현으로 진보언론은 진보정권에 대해 ‘빨아 주지 않아도 애정을 가지라’고 요구했다. 따질 거리도 아니다. 하지만 ‘애정’을 갖고 잘되라고 충고하는 말까지 ‘적폐’로 모는 게 최근 분위기다. 오죽하면 안희정 충남도지사나 서민 단국대 교수 같은 사람까지 경고음을 날리겠나.

‘어이쿠, 오래가기 힘들겠다’고 싶었다. 그랬더니 이번엔 또 반대쪽이 과속한다. 이래저래 한국 정치는 과속 경쟁이요, 상대 실수로 장사하는 정치다. 합리적인 목소리는 양쪽에서 비난받는다. 아니 누구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끼리끼리 모여 자기들끼리 만세 부르는 ‘빠 정치’다.

크리스마스다. 2000년 전에 아기 예수는 가장 낮은 곳으로 왔다. 그의 메시지는 ‘사랑’과 ‘용서’였다. 우리 정치는 그 반대로 치닫고 있다. ‘증오’와 ‘보복’이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멈춰 서서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김진국 중앙일보 칼럼니스트